한국에는 ‘보통 사람들’에 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이미지는 현실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룰 때 심각한 걸림돌로 작동한다.
연예인과 일반인
배우 이선균이 세상을 떠난 후, 이번에도 누구 탓인지를 놓고 수많은 말이 오간다. 피의 사실 공표를 여론전 도구로 사용하는 국가 권력, 사실과 소문을 뒤섞어 뉴스 상품으로 가공하는 언론, 대중의 관심을 자신의 이익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는 미디어 창작자, 이들 모두에게 탓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성된 ‘빌런들’의 목록은 눈앞의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파편화할 뿐이다. 맥락, 환경, 구조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왜 한국의 국가 권력은 이토록 여론전에 집착하는가? 연예인이라는 직종은 어쩌다 그런 여론전의 도구가 됐는가? 연예인 루머로 장사질하는 악인은 왜 이토록 많은가? 낯선 타인을 공격하고 비난할 거리를 제공하는 정보가 비싼 값에 팔리고, 타인의 인격을 파괴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감정의 경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해 ‘재미’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악인들은 이런 재미를 자신의 이익으로 전환한다.
대중은 이런 구조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조 전체가 대중이라는 기본 토대 위에 구축돼 있다. 대중이라는 덩어리 안에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거나 재생산하는 사람도 있고, 소극적인 관찰자도 있고, 아예 무관심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감정의 경제와 무관하게 살 수는 없다. 그게 곧 한국의 사회적 관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항상 사회정치적 문제가 발생하는 영역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치 ‘일반인’과 ‘연예인’은 전혀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일반 대중’은 국가 권력이나 언론의 작동 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빙>의 착한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들’에 관한 전형적 이해 방식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드라마 <무빙>이다. 이 작품뿐 아니라 강풀의 작품 대부분이 ‘보통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에 기초한다.
<무빙>의 세계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에는 선한 본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악한 국가 권력이 있다. 남한과 북한의 초능력자 모두 기본적으로는 전자에 속한다. 그들이 정의롭지 않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대부분 국가 권력의 개입 또는 강제 때문이다. 그들은 그러나 국가 권력에 대한 윤리적 또는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한과 북한의 권력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북의 초능력자 대부분이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악행에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협력한 이들이다.
‘악한 국가 권력 vs 착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구도는 가해자-피해자 관계의 변형이다. 이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이 초능력자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의 잔혹함을 강조한다(여러 한국 드라마가 신체적 폭력에 집착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그런데 이런 식의 구도는 무엇이 보통 사람들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지 답할 수 없다. 피해자라는 공통점만으로 국가 권력에 함께 맞서 싸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가족이라는 장치가 개입한다. <무빙>의 초능력자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서로 연대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이나 ‘행복한 가족’에 대한 희망이 보편적 휴머니즘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북한 초능력자는 희수네 치킨집으로 들어와 ‘삼촌’이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법 역시 유사 가족 관계를 맺는 것뿐이다. 결국 가족이 사회적 관계의 유일한 형태가 된다.
한국인의 의식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반정치적 믿음이 있다. ‘정치는 권력자의 영역이고, 평범한 국민에게 중요한 건 먹고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개인을 민주주의의 시민이 아니라 정치와 분리된 백성으로 만든다. <무빙>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믿음이다. 드라마는 가족애를 통한 백성의 연대를 꿈꾸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가깝다.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와 ‘제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아는’ 보편적 감각은 양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귀한 제 자식’을 위해 타인을 향한 폭력도 불사하는 부모의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과 가족의 행복에만 몰두하는 반정치적 백성이 ‘평범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곳에서, 평범한 사람 사이의 폭력이 반복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보통 사람이라는 성역
일반인, 일반 대중, 일반 국민 따위의 말은 어떤 양극화된 구조를 전제한다. 한편에는 돈, 권력, 명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건 이런 특권층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이 계층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이들이다. 다른 한편에는 수동적 관찰자인 보통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권층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방식으로만 행동한다. 공동체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그런 문제에 관한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이런 양극화된 구조에서 탈정치적 성역화라 부를 만한 현상이 나타난다. 현실 정치의 더럽고 복잡한 문제는 정치인들이 맡고, ‘일반 국민’은 순결한 공간에 남아 명령(혹은 읍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도 온라인 여론을 조직하고, 대규모 거리 시위에 참여하지만, 이런 활동 대부분은 본래적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사랑 혹은 증오를 조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런 성역화는 배제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래서 정치 참여의 고전적 방식, 즉 대안 정당 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 등은 노골적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일반 국민은 결코 정치라는 특권층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을 대의 민주주의의 일반적 특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이해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두 대의 체제지만,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사회·정치 운동이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위축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일반 국민과 정치의 극단적 분리는 한국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런 분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정치의 영역에 진입하는 시민이 ‘평범한 사람’의 지위를 차지할 때만 한국 민주주의는 정상화될 수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