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롯데장학재단 이사장 허성관 “재벌 장학재단 확 바꾼다”

재벌의 공익재단은 대체로 ‘그렇고 그렇게’ 운영된다. 그나마 장학재단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배움을 이어가게 하고, 소외된 지역에 사회공헌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증여세를 감면해주는 세제혜택도 매력이고, 주총에서 우호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방어에도 유용하다. 게다가 친인척들이 요직을 차지해 월급을 받고, 장학사업은 쥐꼬리만큼 하는 장학재단도 숱하다.

최근 롯데장학재단이 재벌가 장학재단 사이에서 화제에 오르고 있다. 롯데장학재단도 과거 오너의 딸이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지난해 재벌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 이사장으로 와 내부를 ‘확’ 바꾸고 있다. 그는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72)이다. 그는 원래 부산 동아대에서 회계학을 가르치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해양수산부 장관, 행자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기자가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재벌 장학재단 이사장이 됐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전혀 재벌과 인연이 없다”면서 “전임 이사장 측에서 광범하게 사람을 알아보다 누구에게 ‘맡아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나를 추천했다”고 말했다. 추천 이유는 ‘장학재단 운영 경험이 많다’는 것이었다. 허 이사장은 “대학 장학재단 설립을 주도했고, 삼일회계법인에서 만든 장학재단 이사를 6년간 해 공익법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재단의 규모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냈다.

“1984년 설립된 롯데장학재단은 지금까지 4만5800명에게 685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매년 80억~100억원 정도를 사업비로 쓴다. 재산도 장부가 기준 3700억원이 넘고, 주식도 시가 기준 6000억원을 보유한 굉장히 큰 장학재단이다. 아마 우리나라 5대 민간 장학재단에 들 것이다.”

노무현 정부 해양부, 행자부 장관 역임

-지난해 7월 31일 신규 이사로 선임되고 9월 10일 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하자마자 한 일은 무엇인가.

“과거 재벌 장학·문화재단은 기업에서 직원을 파견하는 일종의 계열사처럼 운영했다. 나는 지난해 12월 말 계열사 파견직원 대부분을 기업으로 돌려보냈다. 실질적으로 재벌 총수의 입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위함이다. 그러다보니 자체 운영비는 조금 늘어났다.”

-기부자 입김에서 완전히 독립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물론이다. 장학재단 이사장은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가져야 한다. 재단 사업도 기부자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사업을 하더라도 롯데라는 기업집단이 건실한 기업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을 해야 한다.”

-과거 장학재단은 중·고·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되고 대학도 상당 부분 국가장학금을 주는 상황에서 장학재단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내년부터 고교까지 무상교육이다. 대학도 한국장학재단에서 매년 근 5조원을 지원하고, 저리 융자를 해준다. 그래서 민간 장학재단은 역할 분담을 잘해야 한다. 우리 재단 정관에 장학사업과 학술지원을 같이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그동안 학술지원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술·문화지원사업을 많이 하려 한다. 금년에 대략 72억원의 예산으로 60%는 장학보조, 20%는 학술진흥사업에 쓰고, 10% 정도를 복지에 쓴다. 장학사업도 성적이 아닌, 공부지원금 형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청년들이 생활비 버느라 힘들어한다.”

허성관 이사장 저서 <개성상인의 탄생>

-지난해 재벌 장학재단으로는 이례적으로 ‘롯데출판문화대상’을 만들었다.

“그렇다. 지난해 2억5000만원을 배정했고, 호응이 좋아 올해도 할 것이다. 학술지원은 이공계는 풍족해 인문계 위주로 지원하려고 한다. 경제·문화 등 소규모 학술활동 연구모임이 많은데, 이런 모임은 학문의 실핏줄 같은 조직이다. 활동 내용을 심사해 500만원에서 1500만원까지 20개 팀을 지원할 예정이다.”

롯데장학재단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미처 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찾아 지원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마천의 <사기>를 완역하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4년 걸리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허 이사장은 “부끄럽게도 우리는 <사기> 본문만 번역하고 주석을 번역하지 않았다”면서 “주석을 보지 않으면 사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작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책연구기관에서 해야 맞다. 허 이사장은 지원사업을 선정하는 데 첫 번째 기준은 나라와 사회 전체에 바람직한 것인지 여부이고, 다음은 재산을 출연한 기업가 입장에서도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기준을 갖고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것들을 챙기고 있다고 했다.

사마천 <사기> 완역 재단사업으로 추진

허 이사장은 1947년 마산(창원) 출신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 가족이 전남 광주로 이사해 서중·광주일고를 나왔다.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 농민이 서중 동기동창이다. 그는 1966년 부산 동아대 상학과에 입학해 70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에는 민간기업이 낫다는 분위기였다”면서 민간기업으로 직장을 옮긴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민간기업 생리는 그의 생각과 달랐다.

그는 한 경제연구소에서 일하다 1979년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뉴욕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198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받기 전인 1985년 뉴욕시립대 교수로 자리잡았다. 1979년부터 80년대 초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허 이사장은 “당시 나는 공부하느라 엎드려 있어 지금도 미안한 감이 있다”고 말했다. 1986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바로 그의 막냇동생으로 현 허성무 창원시장이다.

허 이사장은 1988년 가을 귀국해 모교인 동아대 교수에 부임했다. 그리고 부산 경실련에서 납세자운동본부장 등을 하면서 사회참여를 시작했다. 그는 “경실련은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으로 함께한 김태동, 이근식, 강철규, 윤원배 등은 옛날 한국은행 같이 다닌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김태동 김대중 정부 경제수석, 강철규 노무현 정부 공정거래위원장, 윤원배 공정위 부원장 등은 한 시대 우리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던 사람들이다. 허 이사장은 “한 번 해보려 하다가 상처만 받은 사람들로, 생각은 반듯한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그는 ‘대놓고’ 노무현 지지운동을 했다. 그는 “부산에서 교수유세단을 만들어 전철 안 유세까지 했다”면서 “그때 ‘좀 돌았다’”고 말했다. 기자가 ‘왜 노무현에게 꽂혔나’라고 묻자 그는 “이제는 해방 이후 세대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후보는 실천력·행동력이 뛰어났고 무엇보다 복잡한 사안을 간단히 요약·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답했다. 사실 그의 처가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진보적’ 집안이다. 장인 김문갑 선생은 해방 직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중앙위원과 중립화통일추진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가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한 배경에는 이런 집안적 배경도 있다.

허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됐다. 해양부 장관 시절 그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해운사가 선박을 건조하기 어렵자 ‘선박펀드’를 처음 만들어 ‘미래지향적 장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가 두각을 나타낸 공직생활은 행자부 장관 시절이다. 그는 해방 이후 계속된 재산세 과세기준을 면적에서 가격으로 바꾸고, 공직자 재산등록제에서 주식 백지신탁제를 도입했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기억하는 사건은 2003년 철도노조, 화물연대가 동시파업한 ‘화물연대 파업’이다. 이 사태는 여러 부처가 관련된 사안이었다. 화물차 기사를 노동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노동부, 부두에 컨테이너가 쌓여 항만이 마비된 상황은 해양수산부, 전국적 물류대란이 일어난 상황은 국토교통부, 수출입 문제는 외교통상부와 얽혀 있었다.

허성관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재단 개혁 계획을 밝히고 있다.

동아대 교수 재직하다 부산경실련 참여

행자부 장관인 허 이사장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으로 각 부처 차관·실장급이 참여하는 회의를 주재했다. 일단 부산항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를 치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근처 대학 운동장을 급하게 빌리기로 했다. 우회도로에 터널이 있었고, 이 터널 요금을 면제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때 국토교통부 모 실장이 ‘전례가 없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때 허 장관은 “이 XX야. 국가위기 상황에서 전례는 무슨 전례야. 없으면 만들면서 가야지”라고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 욕을 먹은 실장은 꼼짝 못했고 이후 일은 순탄하게 처리됐다.

-요즘 문재인 정부는 관료에게 포위됐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정부 조직과 공무원 인사를 담당했던 장관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어떻게 평가하나.

“정부 밖에 있을 때는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장관을 맡아보니 그렇지 않더라. 공무원은 아주 열심히 일한다. 장관은 그런 공무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개인의 발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장관을 하면서도 부하를 개혁대상으로 여기는 장관이 있는데 그래서는 일을 할 수 없다.”

-경영과 정부 운영을 결합한 정부 혁신을 주장하는 <빛나는 롱런>이라는 책을 썼다. 튼튼한 국정운영을 위한 정부 혁신에 조언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부 혁신에 조언한다면.

“단편적 예를 들면, 문 대통령은 역사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이상룡 선생 이야기부터 항일투쟁·친일청산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백범기념관에서 국무회의도 했다. 그랬으면 국무위원이 대통령의 의지를 구현해야 하는데, 전혀 실행되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 생각은 옳은데, 그것을 구현하는 국무위원이 없어 보인다. 국무위원들 역사 의식이 없다는 얘기다. 가시적인 성과가 하나도 없으니 대통령의 말은 그냥 립서비스로 끝난다.”

-최근 7개 부처 개각에서 2명이 낙마했다. 이례적으로 임명 취소사태까지 벌어졌는데 뭐가 문제인가.

“얼마 전 민정수석실에서 7급 공무원이 말썽을 피웠다. 어떻게 7급 공무원이 대통령에게 맞서려 하나. 누가 옳고 그르다는 차원을 넘어 이것은 100% 민정수석이 잘못한 것이다.”

허 이사장은 은퇴 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시간강사를 했고, 광주 과학기술원장도 역임했다. <경국제민의 길> <비정상 경제회담> 등의 책을 통해 우리 경제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우연히 발견된 개성상인 박영진가의 초서체 장부책을 접하고 8~9년 동안 연구해 이것이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 장부임을 밝히는 논문을 영문 등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은 경제·회계학은 물론 한문과 이두문까지 알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논문으로, 복식부기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져 1900년대 우리에게 도입됐다는 정설을 뒤집는 것이었다. 이 논문은 2014년 <매일경제>가 선정한 우수논문상에 뽑혔다. 70세 가까운 ‘노학자’가 우수논문상을 받는 것도 이례적이었다. 이 논문은 <개성상인의 탄생>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일각에서는 그의 이사장 취임을 ‘친노의 낙하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임명권자가 사실상 민간기업인이라는 점에서 ‘초빙’ 성격이 더 짙다. 허 이사장은 학문적으로도 성과를 낸 학자이고, 두 번의 장관직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세 번째 길을 간다. 재벌 장학재단 이사장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길은 앞서 간 두 번의 길에 비하면 비교적 ‘손쉬운 길’일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