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예술과 사회]황순원의 ‘기러기’와 역사에 대한 예의

지난해 <시대정신과 지식인>이란 책을 냈다.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지식인 24명의 사상을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조명한 책이다. 이 책에서 소설가로서 다룬 이는 이광수와 황순원이다. 황순원의 경우 그의 장편소설 <움직이는 성>을 중심으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책임에 관한 문제를 리영희와 비교해 가면서 살펴봤다.

황순원은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에 이르기까지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우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장편소설 말고도 그는 국민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를 위시해 <목넘이마을의 개>, <학>, <잃어버린 사람들> 등을 통해 우리 단편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그가 창조한 서정적인 세계에는 우리 겨레의 역사와 삶과 꿈이 담겨 있다.

<황순원 전집1-늪,러기>, 민음사/민음사 제공

황순원의 단편소설집 가운데 이채로운 것은 두 번째인 <기러기>다. <기러기>에 실린 작품들은 일제 말기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에 칩거할 때 쓰였다. 하지만 <기러기>가 출간된 것은 해방 직후에 쓰인 세 번째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보다도 늦은 1950년이었다.

뛰어난 다른 작품들도 많은데 여기서 <기러기>를 주목하는 것은 이 단편집이 갖고 있는 사연 때문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은 <별>과 <그늘>을 제외하고는 해방 전에 발표되지 못했다. 우리말로 쓰여 있던 탓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황순원은 이를 거부하고 고향에 머무르며 발표될 기약도 불투명한 소설들을 쓰면서 해방을 기다렸다.

적잖은 소설가들이 친일로 전향한 당시 현실을 생각할 때, 비록 광복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황순원은 이렇게 원고지 위에서 언어를 통한 광복운동을 조용히 전개한 셈이었다. <산골아이>, <황노인>, <독짓는 늙은이>, <기러기> 등을 포함해 단편집 <기러기>에 담긴 소설들은 바로 이런 뜻 깊은 사연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다. <기러기>의 ‘책 머리에’서 황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냥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에나 다락 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건만 이 쥐가 쏠다 오줌똥을 갈기고, 좀이 먹어 들어가는 글 위에다 나는 다시 다음 글들을 적어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렇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한 쪽 반 정도의 분량으로 이뤄진, ‘1950년 삼월’이라고 적혀 있는 이 서문은 황순원이 남긴 글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그의 담담한 육성이 어떤 소설들보다 더 깊은 감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황순원은 일생 내내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월남했으나 1949년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던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권력 비판이 아니라 인간 탐구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탐구는 허공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겨레의 삶과 말과 이야기 속에 놓여 있었다. 비록 발표를 기약할 수 없다 하더라도, 소중한 겨레의 언어로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방식을 통해 전승함으로써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사회 지식인이 보여준 최고의 정신적 광휘(光輝)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황순원의 <기러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최근 논란이 되는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 교과서가 친일파를 애국지사로 되살리고 친일자본을 민족자본으로 둔갑시키는 등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수용했다고 진보적 역사학계는 비판하고 있다.

역사정의실천연대 소속 회원들이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친일, 독재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 촉구 기자회견’에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검정 승인을 취소할 것을 교육부에 촉구하고 있다. | 정지윤기자

현대사의 주요 쟁점에 대한 이러한 역사 논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몇 해 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놓고 진보학계 지식인들과 ‘뉴라이트’ 지식인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진행된 바 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과연 우리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역사를 보는 눈이 당연히 하나일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의 복원과 이에 대한 해석은 고정돼 있지 않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역사는 재구성되고 재평가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 전체로서의 역사다. 설령 부분적으로 근대화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의 수탈을 위한 것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일차적으로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아무리 객관성으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역사 이해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에 대한,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한 역사 이해야말로, 미셸 푸코의 이론을 빌린다면 학문과 권력 관계의 어두운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날 밤 쇳네는 아랫목에 애를 재워놓고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남편이 전에 입던 다 낡은 옷가지들을 꺼내어 여기저기 손질하기 시작했다. (…) 이 밤은 얼마나 깊었는지, 어디서 봄기러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설 <기러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만주로 떠난 남편의 편지를 받고 남편에게 가기로 마음을 다잡는 내용이다. 황순원은 소설 말미에 ‘1942년 봄’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황순원은 이미 발표한 소설들을 평생에 걸쳐 조금씩 반복해 개작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우리말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혼자 작품을 쓰고 석유상자 밑이나 다락 구석에 놓아두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한 바 있다. 동시에 언어는 ‘겨레의 집’이기도 하다. 황순원뿐만 아니라 이육사, 윤동주, 그리고 최현배 등을 포함한 국어학자들이 겨레의 말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통과 희생을 치렀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당연한 책무다.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이 황순원이 이렇게 원고지 위에서 벌인 광복운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