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4) 조영래, 비밀 대책위 가동하다

과학적 접근 위해 장재연 등 전문가 참여… 1980년 무렵 환경관심 ‘개연성 이론’ 제시

1985년은 온산공단 공해로 어패류가 폐사하자 해녀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팔·다리가 쑤시는 ‘온산병’ 증세를 호소하기도 했다.

“아니, 형님이 어쩐 일로?”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 연구원 장재연(현 아주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시민환경연구소장)은 실험실에서 뜻밖의 방문자를 맞았다. 그가 반색하고 나서자 방문자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쉿!”

뜻밖의 방문자는 박석운(현 노동인권회관 소장)이었다. 그의 서울대 약대 동기이자 친구인 박남운(한의사, 현 미국 거주)의 형이었다. 그들이 입학하기 전 해인 1976년 12월 긴급조치 9호 체제가 강요한 ‘학원의 침묵’을 극적으로 깬 ‘영웅적’ 학생운동가로, 복역한 후에는 노동운동권에서 활동하는 당대 운동권의 거물이었다. 그런 그가 무슨 일로 연구소에 나타난 것일까.

“이것 좀 분석을 해야겠는데….”
박석운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뭔데요?”
“온산 시료(試料)야.”

장재연은 움찔했다. 온산괴질, 공해병, 이타이이타이…. 말로만 듣던 어마어마한 공해사건의 열쇠가 바로 이곳, 자신이 있는 실험실에 떨어지다니!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났지만 그것은 곧 흥분으로 바뀌었다.

당시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는 ‘온산병 사태’에 대한 입장이 묘했다. 소장인 권숙표 교수(현 연세대 명예교수)가 환경청이 위촉한 ‘온산 해안부락 역학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산시료 떨리는 손으로 건네받아

1985년 1월 18일자 한국일보의 ‘온산공단 주변 어촌주민 500명 이타이이타이병 증세’ 보도 후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부 측과 반공해단체가 정반대의 주장을 펴면서 공해병이냐, 아니냐는 논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한국일보 보도 다음날인 1월 19일 환경청은 “온산공단 일대의 환경은 양호하다”며 “공해병이 아니다”라고 공식 부인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는 이에 반발, 다음날 환경청을 비난하며 조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자료를 내놓았다.

공해병 공방은 공문연의 주장에 일부 전문가와 언론이 동조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환경청은 공해병 논쟁이 시작되기 전인 1984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등에 용역을 의뢰, 1년 동안 울산·온산공단 일대의 공해 피해 여부를 조사했다. 이 조사의 결과물인 ‘울산·온산 공해피해 주민 이주 대책을 위한 조사연구’라는 보고서가 환경청의 공해병 부인 근거였다.

그런데 조사단을 이끈 김정욱 교수(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공동대표) 등 일부 전문가들이 언론을 통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조사 수치와 실제 상황도 차이가 있다고 폭로하면서 환경청은 딱한 처지에 몰리게 됐다.

주민 집단 공해소송을 위해 ‘온산병’ 조사에 나섰던 조영래·박석운·문재인·김매자(왼쪽부터).

박석운이 온산 시료를 갖고 온 때는 공해병 시비가 막 불붙을 즈음이었다. 장재연은 떨리는 손으로 시료를 건네받았다. 이는 단순한 시료가 아니라 자신을 시험하는 ‘인생의 시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장재연이 ‘환경’을 처음 대한 것은 1978년이다. 자연계열 77학번인 그는 2학년 때 약대를 선택하면서 위생학을 수강했다. 위생학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학이나 사적인 스터디그룹을 통해 환경을 접했던 다른 예비 환경운동가와 달리 그는 학과 공부를 통해 ‘정통’으로 환경문제에 눈뜬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대학원 시절은 그에게는 일종의 방황기였다.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운영하는 서울 문래동 그루터기 야학에도 관계하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4학년 때인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그것도 마뜩찮아졌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분명한 진로를 설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방책이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법이다. 끊임없이 ‘결단’을 통해 제어하지 않으면 인생은 그냥 굴러가게 돼 있다. 졸업하고 군대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장재연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대학원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그러다 보니 집안 형편상 돈도 벌어야 하고…. 여기까지가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 연구원 겸 조교가 된 그의 이력이다.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이 시료 출처

그런데 그의 내면적 방황은 여기에서 멈췄다. 연구소에서 그가 한 첫 작업은 포항제철 환경오염 조사였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졸업하고 할 게 마땅찮은 이공계통의 의식분자가 할 수 있는 ‘평생과업’을 비로소 찾아냈다.

환경과 공해는 중요한 문제이면서 전문가의 몫이라는 게 그가 얻은 결론이었다. 당시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는 환경·공해문제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대부분 이곳으로 시료를 들고 오거나 자문을 구하곤 했다. 다시 말하면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시료를 분석하면서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걸 왜 석운 형이 갖고 왔을까. 공문연도 있는데 그것도 아니고 공해문제와는 무관한, 노동운동하는 사람이…. 의문은 곧 풀렸다. 시료의 출처는 뜻밖에도 조영래 변호사(1990년 12월 작고)의 사무실이었다.

온산병 사태의 환경운동사적 의미 가운데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온산병 사태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많은 청년·학생·성직자·사회운동가·학자·과학기술인 등을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환경·공해문제에 끌어들인 점이다. 피해 당사자인 온산 주민은 물론 부산·울산 등 지역사회, 그리고 서울의 여러 단체와 전문가 그룹에서 수많은 ‘대책위’가 만들어졌다. 조영래 변호사가 지휘하는 대책위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조 변호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조영래 신화’라는 한 마디가 잘 말해준다. 그런 그가 온산병 사태에 주목, 비밀리에 대책위를 가동한 사실은 흥미롭다. 박석운의 권유로 이 대책위에 참여했던 장재연의 최근 회고.

“대책위는 조 변호사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조영래·정문화·박석운·조홍섭·안병덕·윤제용 등이 있었고, 끝 무렵에 김창엽이 나왔다. 그때는 (운동권이) 과학적 해석 능력이 없을 때여서 전문성을 부여하는 일을 우리가 많이 했다. 설문지를 만들고, 역학자료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고… 정문화 선배는 빨리 터뜨리자는 쪽이고 나는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자는 쪽이라 고등학교(중앙고) 선후배 사이지만 많이 부딪쳤던 기억이 난다.”

조 변호사가 온산병에 주목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막내동생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가 공해연구회를 이끄는 등 반공해운동을 하다가 미국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조 변호사는 1971년 사법시험(13회)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재학하던 중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이때 그는 대학원 논문심사도 앞두고 있었는데, 대학원과 사법연수원에서 모두 제적됐다. 게다가 1974년 4월 이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 동안의 장기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1980년 복권된 그는 뒤늦게 대학원과 사법연수원을 마칠 수 있었다. 그가 환경·공해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무렵이다. 그 증거가 10년 전 거의 완성단계였던 석사학위 논문 ‘노동계약의 효력에 관한 연구’를 폐기하고 새로 ‘공해소송에 있어서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로 논문 주제를 바꾼 것이다.

현대적 환경소송의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가 ‘개연성 이론’이다. 쉽게 설명하면 공해문제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피해가 나타났을 때 가해자가 책임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지 않으면 피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당시 인과관계 입증과 관련해 국내에서는 개연성 이론이 잘 통하지 않던 시절이다. 안경환(현 서울대 법대 교수)에 의하면 그의 논문은 그래서 ‘세상을 앞서 간’ 것이었다.

“그는 일본·미국·독일의 이론과 판례를 검토한 후 한국 법원의 ‘다분히 보수적인 자세’를 비판하면서 입법적 해결을 통해 공해 소송에서 인과관계의 입증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통적인 민법 이론에 수정을 가할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문을 마감한다.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선견적 문제의식과 예비지식은 1988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의 소송대리인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안경환, 조영래 평전, 강, 2006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가 돼 1983년 개업을 한 조 변호사는 사무실 내에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두었다.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에 온산 시료를 갖고 온 박석운이 바로 그곳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시민공익법률상담소는 조 변호사가 ‘환경’을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노동’이 전문인 박석운을 상담원으로 채용했으니 ‘노동법률상담소’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환경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석운의 최근 회고.

공해로 인한 심한 통증으로 허벅지 뼈를 잘라내고 인조뼈를 박은 온산 당월리 주민.

“조 변호사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앞으로는 환경문제가 최고의 래디컬한 운동이 될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미국에 갔을 때 환경 관련 서적을 많이 가져오기도 했다. 그때 나의 관심은 노동문제였고, 조 변호사는 노동·환경을 다 하고 싶어 했다. 다만 내가 환경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조 변호사가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다.”

조 변호사는 1986년 공문연에도 이사로 참여한다. 공문연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그는 1986년 2월 25일 이사로 내정된 뒤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 즈음 공문연은 김수환 추기경, 김지길 목사, 함석헌 선생 등 고문단을 필두로 최연소 이사인 조 변호사까지 26명의 재야 명망가들이 망라된 거대조직으로 커 있었다.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에 따르면 조 변호사는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이 분야에 박학다식한 면도 있었다. 조 변호사는 최열보다 2살 위로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을 대구에서 보낸 인연이 있었다. 조 변호사가 변호사 개업을 한 직후 최열이 그를 만났을 때다. 최열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박석운을 상담원으로 채용한 조영래

“수배 중인 심재권 선배의 안부를 전하면서 ‘내가 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조 변호사는 자신이 그런 논문을 썼다며 ‘좋은 걸 택했다’고 말했다. 나는 ‘앞으로 연구소에 참여해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조 변호사도 ‘기회가 되면 참여하겠다’고 수락했다. 그래서 이사진 개편 때 이사로 들어온 것이다.”

조 변호사가 온산병 사태와 관련해 비밀 대책위를 가동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조 변호사는 당시 반공해운동권 활동가나 전문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해 실태를 조사하고 폭로하고 대책을 촉구하고 피해주민을 조직하고…. 말하자면 최열식도, 동생 조중래식도 아닌, 조영래식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줄리아 로버츠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에린 브로코비치’는 공해를 유발한 PG&E사와 피해를 본 힝클리 주민의 법정싸움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영화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지만 조 변호사가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주민 집단소송이었다.

장재연에게 온산 시료가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보면 당시 조 변호사는 공해소송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엿볼 수 있다. 박석운의 기억에 따르면 조 변호사를 비롯한 조사단이 온산에 내려간 때는 1985년 1월쯤으로 추정된다. 한국일보 보도로 온산병 사태가 점화된 이후이고 윤종현 변호사(현 법무법인에이스 대표변호사)가 합류하기 직전의 일이다.

조사단의 1차 집결지는 울산 태화호텔 커피숍. 멤버는 조 변호사와 박석운, 공문연의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 부산에서 올라온 문재인 변호사(현 청와대 민정수석), 울산의 내과의사 김매자(현 울산병원 부이사장), 포항의 피부과 의사 등 총 6명이었다. 다시 박석운의 기억을 빌려보자.

“조변(조 변호사)은 그냥 간 게 아니라 소송할 준비를 하고 간 것이다. 입증 자료를 만들기 위해 내과·피부과 의사를 참여시켰고, 실제 소송을 위해서는 현지 변호사인 문변을 불렀다. 정문화 선배는 안내하고 주선하는 역이었다. 환경 관련 소송은 집단소송이고 이해관계가 크다는 게 조변의 생각이었다.”

문재인 변호사는 조 변호사가 재입학한 사법연수원 동기다. 박원순 변호사(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함께 이들 사법연수원 동기 3인방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당시 문 변호사는 노무현 변호사(현 대통령)와 함께 공문연 부산지부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온산병 사태’ 에 뛰어든 전문가 그룹. 왼쪽부터 환경학자 김정욱, 약학자 장재연, 의학자 김창엽.

김매자는 이화여대 의대 70학번으로 긴급조치 1호와 9호로 두 차례나 구속된 전력이 있었다. 본과 3학년 시절 이른바 ‘이화여대 손수건 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응시원서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의사 자격시험을 쳐 전국 수석을 차지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김씨는 이화여대 운동권 출신인 조 변호사의 부인 이옥경(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을 통해 연결됐다.

다시 장재연이 있는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 실험실로 돌아오면, 조 변호사의 이런 노력은 아쉽게도 무위로 끝나고 만다. 시료 분석 결과가 ‘시원찮게’ 나왔기 때문이다. 시료 분석의 포인트는 혈액 속의 카드늄 농도였다. 장재연의 기억에 따르면….

“이타이이타이병 증세라고 해서 카드늄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는데 수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산에 아연회사가 있어서 제련할 때 부산물로 카드늄이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범위를 넓혀서 얘기해야 한다고 석운 형과 대화하면서….”

무위로 끝난 조 변호사의 노력

온산병 사태에 불을 붙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가 꺼림칙하게 생각했듯이 온산병을 이타이이타이병으로 몰아간 반공해운동권의 작전은 ‘양날의 칼’이었다. 온산병 사태를 사회이슈화하고 국제적 관심사로까지 확대시킨 점에서는 이 ‘작전’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해소송 등과 같은 다른 차원의 싸움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

“공해문제연구소가 이타이이타이병이라고 너무 쉽게 주장하는 바람에 어려워졌다. 이슈 제기에는 성공했지만 (반공해운동이) 신뢰를 잃는 우를 범했다. 그때는 종합적인 역학조사를 할 능력이 안 됐지만 그래도 복합공해병으로 갔어야 했다. 조변도 달리 접근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박석운의 말처럼 온산의 공해는 가해자가 불분명한 게 특징이었다. 당시 온산공단에는 석유화학 5개 공장, 비철금속 5개 공장, 기타 2개 공장 등 각기 다른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12개 공장이 가동 중이었다. 주민들이 비슷한 증상을 일으킨다 해도 어느 공장의 공해 때문인지, 복합적인 요인 때문인지, 복합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겹쳐서 나타나는지 밝히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온산병 투쟁의 지휘부 격인 공문연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최열에게도 가장 절실한 것은 이런 인과관계를 전문적으로 밝혀줄 의사였다. 감옥에서 읽은 공해서적을 통해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미나마타병을 구명(究明)한 일본 의학자 하라다 마사스미(原田正純, 전 구마모토대 교수)였다. 반공해운동에서 인과관계의 중요성과 이를 규명하기 위한 고도의 의학적 지식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온산병 투쟁은 아쉬운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박석운의 주장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석(定石)대로 접근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이나 기술적 역량, 의사들의 비협조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하면 다른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원인불명의 괴질이 발견된 때는 1953년이었다. 구마모토대 의학부 미나마타병 연구반이 유기수은 중독설을 제기한 것이 1959년, 일본 정부가 공해병으로 확인한 것은 1968년이었다. 원인을 밝히는 데 6년, 공식 확인에 9년, 합쳐서 15년이 걸린 것이다. 일본에서 한 가지 요인에 의한 공해병을 인정받는 데 15년이 걸렸는데 한국에서 복합공해병과 싸워서 이기기까지 얼마가 걸릴지는 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秘錄환경운동25년

답이 없다면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거나 적당히 타협점을 찾거나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포기는 있을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최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왜 이 생각을 못했던가. 그는 입에서 짧은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라다 박사….”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