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완 기자
올해 초 한 인권변호사의 저서를 읽다가 이른바 ‘구하라법’을 언급한 구절을 접했다. 구하라법은 양육책임을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권을 배제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일컫는다. 수년 전부터 국회에서 여러 건의 개정안이 발의됐고, 정부도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는 언론보도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나 해서 국회 회의록 등을 살펴보니, 법은 아직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이후 공식적인 논의가 중단된 상태였다.
앞으로 취재해야 할 목록에 구하라법을 추가했다. 국회에서 입법 논의가 재개되는 등 ‘계기’가 생기면 깊게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권이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국회는 열리지 않았다. 더는 ‘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법 개정이 미뤄지면서, 동일한 피해 사례가 양산된다는 게 계기라면 계기라 할 수 있겠다.
고 강한얼 소방관과 선원 김종안씨의 유족, 구하라씨 유족의 법률대리인 등은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러면서 “인터뷰해야죠. 법 통과시키려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하다”는 말에는 아쉬움과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민법이 개정되더라도 자신들은 적용받을 수 없지만, 같은 피해를 보는 이들이 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한 피해자는 답답한 마음과 함께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억울하다고 말해야 억울함을 들어주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약자는 말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러니 강자들은 약자가 얼마나 억울한지 알 수가 없죠. 어려운 국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이게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 아니겠어요.”
총선이 끝나고 22대 국회가 시작되기 전 5월 말까지 시간이 있다. 이번 국회가 끝나면 10건이 넘는 민법 개정안은 그대로 폐기된다. 다음 국회로 넘어가면 법안 발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문제, ‘정의’가 지체되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21대 국회는 문을 닫을 것인가. “누굴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냐”는 피해자의 말에 국회는 답해야 한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