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전성시대]‘말과 소리’, ‘저녁과 아침과 밤’

SF 닮아가는 팬데믹 시대

‘들불처럼’이란 표현이 코로나19만큼 잘 어울리는 예가 있을까. 의혹이 무성한 발병원인이 뭔지는 차치하더라도 델타변이에 이어 오미크론에게 바통이 넘어가는 릴레이 양상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의학전문가들까지 곤혹스럽게 한다. 치사율이 엄청난 에볼라 바이러스의 경우 마르부르크와 수단, 자이르 등 3대 변종은 공기 감염이 되지 않으나 레스턴 변종은 예외다. 다행히 현재까지 레스턴은 원숭이끼리만 전염된다. 그러나 레스턴이 사람들 사이 전염되는 종으로 변이될까 우려하듯, 유독 전파력이 큰 오미크론의 다음 주자(?)가 얼마나 무서운 살상력을 갖고 등장할지는 예측 불가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말과 소리’와 ‘저녁과 아침과 밤’이 수록된 한국어판 선집 <블러드차일드>의 표지 / 비채

치유가 쉽지 않은 전염병의 창궐이나 치료제 부작용 논란은 알고 보면 SF가 예로부터 즐겨 다뤄온 소재다. 아마 어떤 SF보다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어 생생한 현실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특히 옥타비아 버틀러의 인상적인 두 단편 ‘말과 소리’(1983)와 ‘저녁과 아침과 밤’(1987)이 떠오른다. 두 단편은 2016년 번역 출간된 작가의 선집 <블러드차일드>에 수록돼 있다.

‘말과 소리’는 소련이 벌인 생물학전으로 인류문명 자체가 와해한 세상을 그린다. 치명적인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지능이 떨어지면서 문자 해독능력을 잃어 더 이상 문명을 지탱할 여력이 없다. 여주인공은 대학교수였지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아예 글자를 인식하지도 구분할 수도 없다. 무기력해진 자신에게 좌절한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한 암울한 혼란 통에 그는 이제 말을 할 수 없게 됐으나 사려 깊은 한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꾼다.

‘저녁과 아침과 밤’은 항암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악성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자녀들의 비애를 담는다. 이들은 성인이 되면 빠르든 늦든 간에 자기 몸에서 뼈와 살을 발라내는 자해 발작을 일으키며 심지어 타인에게까지 같은 짓을 저지른다. 광증 발현을 예방하는 교정식(특수식단)을 매일 섭취하면 증상을 완화하거나 늦출 수 있으나 근본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에 따르면 소설 속 이런 질병은 헌팅턴병과 페닐케톤뇨증 그리고 레슈-니한 질환 등 실재하는 3종 질환을 한데 뒤섞은 것으로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다.

장르물 전성시대

팬데믹 세계를 다룬 과학소설들은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공권력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피해자(또는 시련을 겪는 이)들이 연대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말과 소리’에서 정부는 증발한 상태, ‘저녁과 아침과 밤’에서 자해유전병 환자들은 이들을 무조건 격리병동에 수용해 정신병자 취급하는 정부에 맞서 스스로 찾아낸 치유법으로 대안을 모색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현 상황에도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년간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을 보면 효율적 통제와 양적 관리에만 치중한 인상을 받는다. 방역패스의 강제가 어째서 지속적 반발을 불러올까? 신규확진자 상당수가 백신 2차 접종자이고 돌파감염 사례가 계속 늘고 있다는 통계에도 교육부 장관과 질병청장은 소아 청소년에게까지 백신 접종을 확대하는 여론을 조성하려다 도리어 후폭풍을 자초하고 있다. SF 속 피해자들은 정부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자구책을 모색한다. 우리도 그러한 현실에 놓여 있는 걸까? 정부가 이제라도 양적 통제뿐 아니라 그간 등한시했던 감염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정책적 배려 또한 면밀히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