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최후의 식량에 처한 인간들

연극 <비정규 식량분배자>

누구나 우아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생존의 기억은 때때로 불편하다. 지하실로 숨어든, 아니 정확히 말해 지하실에 갇힌 일곱 명의 남녀에게 마지막 남은 식량이라고는 초코파이 13개와 생수 4통, 껌 3통, 꼬마김치 2개뿐이다. 예기치 못한 전쟁으로 인한 극한의 상황. 곧 바닥을 보이고 말 식량 앞에서 일곱 명은 드디어 의심과 탐욕의 이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빵 부스러기와 한 모금의 물을 갖고 서로를 물어뜯는 사람들. 연극 <비정규 식량분배자>는 그렇게 불편한 생존의 기억을 일깨우는 연극이다.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 덕수궁 인근의 어느 빌딩 지하에 일곱 명의 남녀가 나흘째 갇혔다. 폭격을 피해 무작정 대피했지만 더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거리에는 여전히 포성이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 시신이 즐비한 채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나마 살아있는 자들은 먹을 물과 식량을 찾아 약탈을 자행한다. 언제 전쟁이 끝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지하실은 차라리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이 안전은 한시적이다. 언제 지옥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태다. 사람들의 눈빛은 점점 험악해진다.

극한 상황에서 권력의 향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식량에 다소 여유 있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합의된 질서’가 존재했다. 그래서 최초의 식량분배자는 등장인물 ‘연장자’였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권력을 위임받은 그는 하루 세 끼 과자와 물을 배식한다. 그러나 식량을 담아 놓은 박스가 점점 가벼워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에 대한 다툼과 의심이 커지면서 합의된 질서는 무너진다. 연장자는 결국 “등 떼밀려 식량을 맡았지만 이젠 다른 사람이 해도 좋다”며 권력을 포기한다.

이어지는 권력자는 ‘부상자’다. 초코파이 하나를 슬쩍했다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던 그는 성질이 좀 급한 인물이다. “이대로 버틸 수 없다”며 포탄이 떨어지는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마침내 약간의 식량을 구해 온다. 어디선가 부상을 당한 채 옆구리에 피를 흘리며 지하실로 돌아온 그는 식량 보따리를 손에 들고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를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거나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면서 한 토막의 소시지를 간신히 얻어 낸다. 그러나 그 ‘질서’마저도 한시적이다. 등장인물 ‘약탈 1’과 ‘약탈 2’가 폭력을 행사하면서 음식을 빼앗는 순간, 지하실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에 휩싸이면서 피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문화내시경

연극 <비정규 식량분배자>는 ‘전쟁’과 ‘지하’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점에서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 <언더그라운드>(1995)를 연상시킨다. 또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라는 측면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나 사라 케인의 연극 <폭파>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연극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처럼 페이소스를 불러 일으키는 ‘낭만적 희극’의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사라마구의 소설처럼 환상의 안개를 덧씌우거나 케인의 연극처럼 ‘잔혹한 극단’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 식량분배자>는 오히려 한 편의 ‘리얼리티쇼’처럼 약간의 ‘가벼움’을 동반한 채 흘러간다. 추리와 코믹을 간간이 곁들이면서 관객의 보는 재미도 배려한다. 그런데 이것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창 고조되던 갈등이 어딘가에서 주워 온 담배 한 개비와 켜지지 않는 라이터로 봉합되는 순간,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게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2월에 창단한 극단 이안(異眼)의 첫 작품. 이지수, 유준원, 김철홍, 김병철, 윤영경, 김지용, 신소현 출연. 이달 14일까지 계속된다.

<문학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