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운 맛을 보여다오."

눈물 콧물에 땀까지 쏙 빼게 하는 매운 음식. 이 더위에 체면도 못 차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은 고추장양념닭, 떡볶이, 회냉면, 매운탕, 낙지볶음 등에 열광한다. 그리곤 이렇게 한마디 내뱉어 서양 사람들을 까무라치게 만든다. "시원하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극심하다는 불경기에 대부분 식당이 울상을 짓고 있지만 이 불황에도 '매운 맛'으로 승부하는 식당들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고추장으로 볶은 후 청양고추를 얹은 불닭, 고추장 꽃게구이, 콧물고치, 매운갈비찜, 빨개라면, 그리고 외국 음식 가운데에서도 톰양쿵 등 매운 맛이 많은 태국 음식이나 고추를 많이 사용하는 베트남 음식 전문점들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엔돌핀 촉진 무기력감 극복

입맛이 없거나 우울할 때 사람들은 자극적인 맛을 찾고 톡 쏘는 매운 맛에 이끌린다. 신맛-단맛 등은 혀를 통해서만 느껴지지만 매운 맛은 그저 미각으로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통각세포에서 감지되어 온몸으로 전달되는 맛이기 때문이란다. 매운 음식을 먹는 이들은 입안에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매운 맛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일단 먹으면 온몸이 짜릿짜릿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세포 마디마디가 일어나는 것 같은 그에 중독된다.

기호학자이며 음식평론가인 백승국씨는 "매운 맛은 엔돌핀을 분비시키는 역할을 해서 사람들은 무기력감을 느끼면 매운 맛을 찾고, 매운 맛에 길든 입맛은 보다 더 강도가 높은 매운 맛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즘처럼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세상이 어수선하고 답답할 때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먹으며 화끈하고 짜릿한 쾌감을 체험하고 감정의 찌꺼기를 후후 날려버리거나 땀과 함께 배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매운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심리치료제이며 위안을 주는 친구이기도 한 셈이다.

매운 맛을 세계적 상품으로

매운 맛도 여러 가지이다. 고추에서 나오는 매운 맛만이 아니라 인도의 카레, 헝가리의 파프리카 파우더, 일본의 겨자 등도 맵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으뜸은 역시 고추다. 고추의 종류도 나라마다 달라 인도의 고추는 '혀가 뽑힐 만큼' 맵다고 소문났고 '혀가 욱신거린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악마가 내 몸으로 들어왔다' 등으로 표현되는 각 나라 고추가 매운 맛을 자랑한다.

요리연구가 이미화씨는 "매운 맛의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이 있다"며 "매운맛의 기준표에 의하면 피망이 0이라면 헝가리안 엘료우는 4,000, 타바스코는 3만~5만, 카엔은 10만, 인도산 버드아이는 12만5천이고 아주 매운 아바네로 고추는 30만에 이른다"고 소개한다. 또 고추에 따라 혀보다 입술을 자극하는 고추가 있고 혀의 한가운데를 공략하는 고추도 있으며 매운맛이 사라지면서 부드럽고 향긋한 뒷맛을 남기는가 하면 입안에 오래오래 남아 얼얼하게 만드는 만만디형 고추도 있다.

한국산 고추는 단순히 맵기만한 것이 아니라 오묘한 맛을 담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농심 신라면의 매운 맛을 연구하는 고추연구가 김진석씨는 "우리나라 고추는 단맛, 신맛, 감칠맛 등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져 있으며 일본의 품종과 비교하면 캡사이신 성분은 3분의 1 정도이지만 색소는 2배, 비타민C의 함유량과 당분은 2배 이상"이라고 한다.

최근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자극적인 매운 고추를 많이 먹으면 위가 손상될 것 같지만 오히려 위 점막을 보호하고 항암효과까지 뛰어나다고 한다.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고추의 주요성분인 캡사이신이 함유된 진통제 크림이 판매되는가 하면 캡사이신 성분이 체지방을 분해한다고 해서 2, 3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고추다이어트가 유행하고 있다. 고추로 만든 과자와 아이스크림까지 등장했다.

백승국씨는 "서양 음식의 맛의 핵심이 단맛이라면 한국 음식의 맛의 핵심은 매운 맛"이라며 "이제 외국인에게 한국은 붉은악마, 김치, 고추장 등 붉은 빛깔과 매운 맛으로 기억되므로 매운 맛을 잘 연구하고 세계에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매운 맛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외국인에게도 일단 길들이면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며 더불어 다른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문화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는 눅눅한 장마철. 굳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웰빙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고추장을 넣어 석석 비벼먹는 열무비빔밥, 된장찌개에 살짝 얹으면 더욱 상큼한 청양고추, 얼큰하게 고춧가루를 푼 순두부찌개 등 전통음식을 먹으면서 몸과 마음으로 매운 맛이 주는 엔돌핀을 느껴보면 어떨까.

황인원 기자 hiw@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