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그래도 개천에서 용 나는 것 보고 싶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정의한 것은 유명합니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 문명은 끊임없이 도전에 봉착하는데, 그 도전에 어떻게 응전했느냐의 프레임을 갖고 문명의 발생, 성장과 쇠퇴, 해체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지요.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문명 간에 격차가 발생한 원인과 관련해 환경적 요인이 컸다고 봅니다. 벼나 보리를 작물화하거나 말과 돼지를 가축화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지역마다 달랐고, 그 차이로 인해 식량생산과 문명의 발생, 발전도 다 차이를 보이게 됐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유라시아는 가축화된 동물이 13종이었던 데 비해 남북아메리카는 1종, 오스트레일리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토인비가 환경보다는 인간의 응전 쪽에 더 비중을 뒀다면 다이아몬드는 인간들의 능력이 아닌 환경 조건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의지가 중요한지, 환경이 결정적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 것은 사법시험 존치와 관련한 논란 때문입니다. 사시는 원래 2007년 로스쿨 도입과 함께 2017년 폐지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시 존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사시 존치를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됐고, 김한규 서울변회 회장도 사시 존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변호사만이 아닙니다. 최근 관악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오신환 새누리당 의원도 사시 존치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같은 선거구에서 탈락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역시 사시 존치주의자였습니다.

단순하게 요지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로스쿨은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돈 많은 사람들만 갈 수 있다.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데, 돈 없으면 변호사나 판·검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옳지 않다. 가난한 이들이 돈과 스펙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희망의 사다리가 필요한데, 그게 사시를 존치시켜야 하는 이유다.’

로스쿨이 사시에 비해 진입장벽이 존재하는 건 분명합니다. 유명 사립대 로스쿨은 1년에 등록금만 2000만원이 넘습니다. 국·공립대는 1000만원 안팎입니다. 3년이면 등록금만 3000만~6000만원 이상 들어갑니다. 아무리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로스쿨은 엄두도 못 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로스쿨이 향후 합격률을 고려해 유력자 자녀 위주로 학생들을 뽑는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로스쿨 출신은 변호사시험의 성적부터 판·검사 임용 기준도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 또한 부유층과 고관대작 자녀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9년부터 올해까지 7년간 사시 합격자 중 법조인 자녀 수는 69명이었는데 로스쿨 1~3기 3년간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 법조인 자녀 수는 71명이었습니다. 로스쿨을 두고 ‘현대판 음서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로스쿨은 환경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이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 토인비 식으로 아무리 역경을 극복하려고 해도 환경의 차이-부와 가문-가 상당 부분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결정해 놓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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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로스쿨은 매년 입학정원의 5% 이상을 사회적 취약계층에 할당하고 있고, 2009~2012년 로스쿨에 104개 국내 대학, 70여개 국외 대학 출신자가 입학해 76개 대학에서 합격자를 배출한 사시에 비해 진입장벽이 더 낮아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역전의 사다리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로스쿨은 로스쿨만의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사시는 사시대로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시를 없앨 것이 아니라 로스쿨과 사시를 공존시켜 양쪽의 장점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역전의 사다리라도 있어야 응전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설령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말처럼 사회적인 ‘희망고문’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an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