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베토벤의 음악, 히틀러의 야망, 지휘자의 고뇌

문제작 ‘합창’ 교향곡을 거듭 들었다. 순정한 집념을 가진 자와 광기 어린 야망을 가진 자, 모두가 좋아할 만한, 실로 무시무시한 곡이다.

단어와 문장 사이에 숨길 수 없는 변명과 자기 연민이 드러나지만, 그러나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전 기록 <기억>은 밑줄 쳐서 인용할 만한 사건들로 풍부한, 읽을 만한 책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 히틀러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완전히 철거하고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로 재건축하기로 결심하고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로마를 재현하는 듯한 대건축 계획에 돌입한다.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역사적인 망상’의 설계자가 된다. 독일 수도 베를린이 아닌,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 중심부에는 무려 120m 너비의 도로와 광장을 주축으로 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권위적이었던 형상을 재현한 건축물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설 계획이었는데, 그 중 압권이 무려 18만여명을 수용하기 위해 높이 320m에 육박하는 크기로 설계된 의사당이었다. 거대한 돔형 건축물의 내부는 직경이 무려 251m에 달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의 모형. | 위키백과

전범 재판을 받은 푸르트뱅글러
슈페어는 이 권력의 무한한 욕망이 응축된 건물에 대하여 <기억>에서 이렇게 쓴다. “산처럼 거대한 돔은 성채처럼 육중한 화강암 건물 위에 올려질 것이다. 섬세한 프리즈, 4개의 기둥마다 4개씩 무리를 이룬 홈이 파진 기둥들, 광장을 바라보는 장면을 따라 이어진 주랑들이 웅대한 입방체 건물에 생동감을 선사할 것이다”(266쪽)라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히틀러는 스탈린의 소련에서도 엇비슷한 건축계획이 수립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념과 지향이 조금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20세기 중엽의 가장 폭력적인 국가 구조를 대표하는 히틀러와 스탈린은 거대한 상징 건물을 앞다퉈 짓는 경쟁에까지 돌입하게 된다. 소련이 레닌을 추모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엄청난 위용의 건물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펄쩍 뛰었다”고, 슈페어는 기록한다. 독일과 소련의 미치광이 정치가와 건축가들이 수립한 기본계획은 당대 건축기술의 모든 역량이 결집된 것으로 그 당시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최대치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크기와 너비가 엇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세상에서 가장 웅대한 기념비적 건물을 짓겠다는 야망이 ‘짝퉁’(때는 1939년으로 스탈린의 소련은 계획을 막 수립한 상태였고, 히틀러와 슈페어는 설계도면까지 완성하여 베를린의 주요 건물을 철거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때문에 흠집이 날까봐 초조해졌다.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다. 모스크바와 베를린이 엇비슷하게 정치적 건물 경쟁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베를린, 아니 세계 장악을 한 이후의 수도 ‘게르마니아’에 들어설 건물은 거대한 돔형이었다. 히틀러는 “마천루가 거기서 거기지. 조금 높거나 낮거나 말이야. 우리 건물의 위대한 점은 바로 돔형이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다행히 미치광이들의 야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패망 당시 베를린과 외곽 도시의 주요 기간시설들을 자학하듯이 폭파하며 망해갔다. 연합군이 군사용으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은 베를린의 주요 건축물과 수도, 전기, 도로, 군사시설 등을 파괴시키는 마지막 작전을 벌였다.

또 이런 대목.

2차대전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12월, 유서 깊은 교향악단, 독일 정신의 수호성지,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말 연주회가 열렸다. 바흐와 베토벤과 브람스와 브루크너의 음악정신과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위대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연주회 직전에 슈페어를 지휘자 대기실로 초청했다. 출중한 실력에 명망이 높은 지휘자들이 대거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곳으로 망명을 떠났음에도 푸르트뱅글러는 베를린에 남았고,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전범 재판정에 섰으며 그 후 7년가량 독일 지역 내에서 연주활동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꽤 많은 자료들은 푸르트뱅글러가 단순한 나치주의자는 아니며 어떤 점에서는 히틀러의 정치문화와 2인자 괴벨스의 문화정치라는 이중 압력 밑에서 독일 음악이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는 한편 유대인 음악가들을 지켜냈던 인물이라는 평도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이 지면에서 쓰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푸르트뱅글러의 친나치 활동의 원인, 특히 그 정신적 배경과 철학적 선택을 공부해 보는 것은 예컨대 서정주 시인이 ‘일제가 한 500년은 갈 줄 알았지’ 같은 말들의 문화적 원인을 해명하는 작업과도 연관되는 의미 있는 일이다.

푸르트뱅글러는 슈페어에게 단호하게 묻는다. 독일이 이길 것 같냐고 말이다. 슈페어는 패전이 가까워졌다고 답했고, 푸르트뱅글러는 고개를 끄덕인다. 슈페어는 푸르트뱅글러에게 말한다. 조만간 스위스에서 열리게 될 순회공연을 마친 후 “독일로 돌아오지 말라”고 말이다. 푸르트뱅글러의 입장과 고뇌를 잘 알고 있던 슈페어의 마지막 호의였다. 이에 푸르트뱅글러는 되묻는다. “그렇다면 나의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되는가?” 이 한마디에 대지휘자의 풍모가 서려 있다. 슈페어가 대답한다. “내가 책임지겠다.”

관객의 환호에 답례하는 푸르트뱅글러. 객석 맨 앞 왼쪽에서 세 번째에 아돌프 히틀러가 보인다. | codan.com

지휘자의 둔중한 발자국 소리에 전율
이듬해 4월, 패망 직전에 베를린필의 마지막 연주회가 열렸다. 심각한 전력난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전용 홀에 난방은커녕 전깃불조차 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슈페어는 최소한의 조명을 위해 전력을 공급하라고 지시한다. 사람들은 코트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슈페어가 베를린필에 특별히 주문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첫 곡으로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엔의 반지> 중 마지막 ‘신들의 황혼’의 피날레를 들었으며,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어 브루크너의 4번 교향곡 ‘낭만적’이 연주되었다. 건축가답게 슈페어는 이 곡들을 “구조적인 마무리 때문에” 특별히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했던 말도 기록하고 있다. “브루크너의 4번 교향곡 ‘낭만적’이 연주되면 끝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야.”

슈페어의 <기억>을 읽으면서, 푸르트뱅글러의 전설적인 녹음들을 다시 듣는다. 1942년, 히틀러 생일 때 연주했던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이 연주 실황은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역사적인 기록 영상으로 다시 볼 수 있다. 또 이 곡에 관하여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마지막 녹음, 1954년의 루체른 실황 음반. 그리고 마지막으로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지휘 음반.

이 세 번째 음반에 대하여 미국의 저명한 음반 평론가 헨리 포겔은 역사적인 명연으로 통하는 이 음반이 사실은 “EMI클래식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짜깁기한 결과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황 녹음을 바탕으로 하되 3악장의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리허설을 녹음한 대목을 짜깁기하여 편집했다는 것이다.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그렇기는 해도, 역시 1951년의 이 음반을 먼저 앞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지휘를 하러 등장하는 푸르트뱅글러의 둔중한 발자국 소리 때문이다. 고교 시절에 친구와 이 대목을 들으면서 전율했던 기억이 있다. 전범자 푸르트뱅글러가 독일 민족주의의 예술적 거점인 바그너의 무대, 바이로이트 축제가극장에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CD로 발매하면서 음반사는 그 소리를 ‘소음’으로 여겨 삭제한 적이 있다. 이제 저작권이 소멸되어 이 실황 녹음을 여러 음반사에서 저마다의 음향철학으로 재발매를 하고 있다. 그 중 한 음반사에서 이 발자국 소리가 결코 소음이 아니라, 베토벤 음악정신과 히틀러의 일그러진 야망과 푸르트뱅글러의 고뇌가 뒤섞인 것으로 여긴 듯,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그래서 <기억>을 읽으면서, 문제작 ‘합창’ 교향곡을 거듭 들었다. 순정한 집념을 가진 자와 광기 어린 야망을 가진 자, 모두가 좋아할 만한, 실로 무시무시한 곡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