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인 시국에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근대 이전 왕후장상보다 더 풍요한 삶을 산다. 결정적 차이는 냉장고와 에어컨이다. 석빙고에 보관된 얼음 배급 문제는 경국대전에 실릴 만큼 중요했고, 에어컨 발명 후 여름 활용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기 위해선 전기의 힘이 필수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사라진다면 이 무더위에 어떤 일이 생길까 상상력을 발휘한 영화가 있다. 2017년,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만든 <서바이벌 패밀리>에서 도쿄의 평범한 직장인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전기가 사라진 세상을 체험하게 된다.
남편은 평소대로 출근을 시도하지만 지하철도 버스도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걸어 회사에 도착해도 엘리베이터가 먹통이다. 전화도 인터넷도 불통이라 헛걸음만 했다. 아내는 냉장고에 꽉 채워둔 식재료 처리에 진땀을 빼고, 장을 보려 해도 신용카드가 먹히지 않는다. 결국 가족은 가고시마로 피난을 결심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네다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2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공항이 좀 멀지만 자전거를 타고 갈 만하다. 그러나 아뿔싸, 비행기도 전기 없이 뜰 수 없다. 졸지에 이들은 1326㎞ 여정을 자전거에 의지해 출발하게 된다.
전기가 끊기면 벌어질 법한 모든 상황이 벌어진다. 수족관 물고기는 굶주린 주민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식량을 대가로 길 안내를 부탁한다. 물자가 있어도 수송할 방법이 없어 순식간에 기아가 창궐한다. 기술도 대비도 없는 도시 주민들이 패닉에 빠지거나 약탈을 일삼는 혼란이 코믹한 정서 속에서도 신랄히 묘사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전기가 잘 들어오던 시절에는 각자 휴대전화나 노트북만 보던 가족은 생존여행 중에 잃었던 공동체 의식을 되찾는다. 가족은 108일 만에 가고시마에 도착하고 2년이란 시간 동안 어느새 불편하긴 해도 시골생활에 익숙해진다. 불쑥 전기가 부활하고 가족은 도쿄로 돌아오지만 이제 그들은 도시락을 싸고 자전거를 활용하며 조금 달라진 일상을 살게 된다.
억지 설정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8월 15일 대만 블랙아웃 사례처럼 ‘대정전’의 위기는 언제 닥칠지 모른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일단 닥치면 통제 불능이다. 한국의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수위권에 도달한 상황. 기후변화 여파로 여름 폭염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블랙아웃은 좀비나 외계인보다 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돼간다.
일각에선 탈원전 정책이 이런 우려를 도외시한 안일한 대책이라 비난하고, 다른 이들은 오히려 재생에너지 확대가 해답이라 목소리를 높인다. 논쟁은 여름 무더위 못지않게 뜨겁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재난 가능성에 대해 별 대책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서바이벌 패밀리>가 선보인 영화 속 재난은 과학자가 등장해 어려운 전문용어로 위기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많은 영감과 시사점을 주는 유익한 교재다(네이버 VOD로 스트리밍 및 다운로드 가능).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