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죽을 시간을 알고 있다면
누구나 죽는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언제 죽을지는 알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젊은 시절은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과 그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을 청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죽음의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까? 이런 생각을 담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작품이 있다. 영화 <부산행>을 만든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그린 <지옥>과 시사성 있는 작품들을 주로 그려온 작가 마세 모토로우의 <이키가미>가 그것이다.
<지옥>에서는 천사라고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3일에서 20년 정도 후의 죽는 날과 시간을 고지한다. 예고된 시간이 오면 대상은 알 수 없는 존재들로 인해 굉장히 잔인한 방식으로 죽어 무기체가 되어 버린다. 그러자 그들은 죄를 지어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나타난다. 죽음의 고지와 처형 장면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면서 그는 많은 이가 따르는 지도자가 된다. 이어서 새진리교라 이름이 붙은 종교의 열정적인 추종집단이 생겨나 지옥행을 고지받은 이들의 지난 죄를 추적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키가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사망예고증을 뜻한다. 마치 현대의 일본처럼 보이는 가상의 국가에서는 국가번영유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예방접종을 하고, 그 접종에서 0.1%의 대상에게는 특수나노캡슐을 투입한다. 이 나노캡슐이 체내에 있는 대상은 18~24세 사이에 이키가미를 받게 되고, 24시간 후 사망하게 된다. 이 제도는 내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사회생산성을 향상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법안이 시행된 후 자살과 범죄가 줄고 국민총생산이 늘었다고 한다. <이키가미> 속 사람들은 규칙과 제도, 즉 법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 사회도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법에 대한 구속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코로나19에 대응한 방역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서로 조심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구분하며 행동했다. 마치 이를 지켜보는 거대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선의로 방역에 협조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돈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지, 피해를 감수하고 자제해야 하는지. 이때 법이 작동해 선을 그었다. 그리고 이를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는 공포를 제공했다. 피해는 공평하지 않고, 세상은 약자에게 더욱 잔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의 믿음과 국가가 정한 규칙이 충돌하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종교계는 오히려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있고, 법은 많은 약점을 노출하며 코로나19보다 무서운 가난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직 세상은 모순이 많다. 어떤 믿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중에 이루어야 하고, 제도는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새해의 첫날 정부는 감염병의 확산을 우려해 주요 해맞이 명소를 폐쇄했고, 그런데도 누군가는 그 선을 넘어 새로 뜨는 해를 보았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코로나19가 끝나게 해주세요.”
<황순욱 초영세 만화플랫폼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