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펀홈>

커밍아웃한 딸의 아버지는 왜 자살했을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집에 알린 지 넉 달 뒤, 돌연 아버지 브루스 벡델이 죽음을 맞는다. 교통사고였다. 그러나 앨리슨은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 커밍아웃한 후 그녀는 아빠가 게이였음을 알게 된 터였다.

영화산업이 얼마나 성차별적인가를 지적할 때 ‘벡델 테스트’가 종종 언급된다. 이 테스트는 세 가지의 기준을 통과할 것을 요구한다.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오는가? 이들이 서로 대화하는가?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는가? 이 테스트의 고안자는 앨리슨 벡델이라는 미국의 여성예술가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바로 앨리슨 벡델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 <펀홈>(Fun home)이다.

앨리슨 벡델의 <펀홈> 중 한 장면 | 움직씨

앨리슨 벡델은 페미니스트이고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다. 앨리슨이 자기 정체성을 깨달은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집에 알린 지 넉 달 뒤, 돌연 아버지 브루스 벡델이 죽음을 맞는다. 교통사고였다. 집 앞 도로에서 트럭에 치인 것이다. 그러나 앨리슨은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 커밍아웃한 후 그녀는 아빠가 게이였음을 알게 된 터였다. 두 사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앨리슨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단순히 죄책감에 불과하지 않다. 앨리슨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애쓴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이야기

<펀홈>은 크게 세 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앨리슨의 눈을 통해 해석된 브루스 벡델의 죽음과 삶이다. 그가 왜 죽었는지를 묻는 질문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묻는 것과 관련된다. 두 번째는 소녀 앨리슨의 성장담이다. 앨리슨은 아버지에게 상처 입고 분개하면서도 아버지의 애정을 그리워하는 소녀다. 한편으로 ‘소녀’로 자라고 싶지 않은 소녀이기도 하다. 그녀가 부모의 세계에서 독립하고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세 번째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사유이다. <펀홈>의 시작과 끝은 그리스 신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이야기에 빗대어 브루스 벡델과 앨리슨 벡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 개의 탐구는 섬세하고 깊이 있게 이루어지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열쇠로 기능한다. 이러한 방식은 사람과 삶을 이해하는 방식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앨리슨이 기억하는 어릴 적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린 악당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예술에 심취했고 열정이 가득했다. 19세기에 지어진 낡고 해진 집을 사서 고집스레 혼자 고칠 정도로 실내장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 결과 집은 장장 18년에 걸쳐 원래보다도 더 아름답게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 열정이 아이들에게까지 흐르지는 못했다. 그는 아이들을 집을 고치고 돌볼 때 조수처럼 부렸고, 불같은 성질을 부릴 대상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취향을 강요했다. 그리고 곁에 있어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앨리슨은 아버지가 꾸민 정교한 빅토리안 인테리어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꼬집는다. 집안 곳곳에 스민 아버지의 감정은 ‘수치심’이다. 바깥세상에는 ‘완벽한 아버지’처럼 보이도록 한 채로, 오랫동안 그는 여러 남성들과 혼외정사를 해왔다.

앨리슨이 아버지와 조금씩 친밀함을 느끼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아버지의 영어 수업을 듣게 되면서이다. 브루스 벡델은 군 복무로 유럽에서 생활하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잇게 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마을 비치 크리크에서 이어온 가업은 ‘장의사’(funeral)였다. (제목 <펀홈>은 여기에서 유래하며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장의사만으로는 수입이 충분치 않아서 브루스 벡델은 고등학교 영어교사 일을 병행했다. 둘은 서로를 ‘가장 가르칠 만한 학생’ ‘가장 들을 만한 수업’으로 인정하며 공유점을 만들어간다. 이 작품의 구성에 문학작품이 중요하게 자리하는 이유는 실제로 앨리슨이 아버지와 서로 연결되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앨리슨이 대학에 가서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더 깊어진다. 브루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율리시스>를 읽게 된 앨리슨에게 참고도서로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의 책을 읽게 한다. 그녀는 공개된 여성 애인이 있던 사람이다. 커밍아웃 후 아버지가 게이임을 알게 되고서 앨리슨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콜레트의 책을 준 것이 의도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아버지도 커밍아웃을 했다면…

앨리슨은 아버지를 위해 <성 정치학>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케이트 밀레트의 <비행(Flying)>을 두고 온다. 아버지는 <비행>을 읽고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밀레트의 철학이 나를 지금껏 예속해 온 철학보다 맘에 든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말은 이렇다. “하지만 한 발은 아직 문 안쪽에 걸쳐 놓고 있어. 사실 지금은 어중간한 상태다. 그러니까… 아, 망할,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군.”

앨리슨 벡델은 <펀홈>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작은 공간’에 갇혀 있었는가를 강조한다. 그가 태어난 곳, 살던 집, 죽은 장소, 묻힌 곳이 반경 1.2㎞의 원 안에 들어간다는 것과 그가 살던 마을이 지리적이나 문화적으로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를 설명한다. 그처럼 ‘도회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 어째서 그 마을에 머물기를 택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다. “한평생 자신의 성적 진실을 숨기며 살다 보면 체념과 포기가 켜켜이 쌓이는지도 모르겠다. 성적 수치심이란 본질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앨리슨은 “아버지의 성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함부로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죽은 아버지는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함부로 변호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동성애 혐오로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다 보면 다른 문제들에 부닥친다. 우선 내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게 어려워진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벽장’ 밖으로 나왔다면(커밍아웃을 의미), 그래서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될까?” 가해와 피해는 복잡한 구도 속에 놓여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 다층적이다. 특히나 가족관계는 쉽지 않은 관계 중 하나다. 부제처럼 희비극(tragicomic)의 무대일 수밖에 없는 곳.

만화로 본 세상

앨리슨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카로스와 다이달로스에 비유하는데, 중요한 것은 앨리슨과 브루스 사이에서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앨리슨은 아버지가 게이임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의 성적 지향에 관해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는 제법 ‘대화’를 이끌어낸다. 앨리슨은 “아버지가 창피해하며 터놓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뚜렷하게 부모의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말들에 익숙하지만, 어쩌면 자식들의 사랑이야말로 애달픈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결국 그들의 자리에 선다. 앨리슨은 바다로 떨어진 이카로스와 대비하며 “아버지는 내가 (바다로) 뛰어들 때 날 잡아 주려고 거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담담한 듯 치열하게 기어이 사랑을 읽어내고야 만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추락에서 건진다.

<박희정 기록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