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아 지갑 놓고 나왔다>-사회적 편견과 자책으로부터 내자신 찾기

<아지갑>의 선희는 얼굴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얼굴을 되찾지 못한 여성들이 넘쳐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여전히 해석이 필요 없는 영역으로 취급하고,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에서 연재하다가 이제 곧 완결을 앞둔 <아 지갑 놓고 나왔다(이하 아지갑)>는 미혼모인 노선희의 딸 노루가 죽으면서 시작한다. 아홉 살 노루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죽지만 혼백의 상태로 노선희의 곁에 머문다. 놀이터에서 100원짜리, 1000원짜리 돈들을 주워다 노선희의 저금통에 채워준다. 아이다운 발상이지만, 아이답지 않은 목적이다. 죽어서도 노루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엄마 노선희였다. 살아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노선희는 아홉 살에 사촌오빠 두 명에게 성폭행당했다. 간식을 가져다주러 문을 열었던 큰엄마와 눈이 마주쳤지만 큰엄마는 도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때 틈새로 보였던 큰엄마의 시선은 선희에게 끔찍하게 각인됐다. 성폭행 사건 이후 어찌 됐든 가족이니 가해자를 감싸려는 아버지에게 반발해 어머니는 이혼을 선언했다. 딸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선희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갑작스럽게 사람들은 선희를 향해 동정과 경멸의 시선을 보냈고, 가정은 갑작스레 쪼개졌으며, 무엇보다 선희는 성폭행이 왜, 어떻게,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 선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표정이 지워진 새의 얼굴로 치환되어 보였다. 인간으로 보이는 건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기이한 형상으로 왜곡되어 비쳤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지내다가 어느 날 선희는 임신한다. 남자친구가 성관계하면서 선희 몰래 콘돔을 뺐던 게 원인이었다. 낙태하려고 했지만 시기를 놓쳤다. 어영부영 아이를 낳게 됐는데, 놀랍게도 아이는 새의 얼굴이 아니었다. 노선희에게 제대로 된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유일한 사람, 노루의 탄생이었다.

미역의효능(필명) 작가의 만화 「아 지갑 놓고 나왔다」의 한 장면./다음웹툰

둘만의 닫힌 세계서 빠져나가는 모녀

노선희와 노루는 둘만의 닫힌 세계에서 살았다. 임신사실 때문에 남자친구는 이별을 통보했다. 선희는 엄마와도 연을 끊었다. 옆집 아줌마나 노선희의 친구들이 도와줬지만, 그들은 여전히 선희에게 새로 보였다. 선희는 자신의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 얼굴을 한 노루에게 의지하며 아이처럼 노루에게 매달리곤 했다. 노루는 그 세계에 익숙해져 있던 ‘애어른’이었다. 조상을 만나 저승엘 가고, 저승에서 원하는 꿈을 꾸면서도 노루는 자기만이 엄마를 돌봐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아지갑>의 초반부다. 이를 토대로 <아지갑>의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루는 노선희의 자녀로 다시 환생하기 위해 저승으로 가고, 노선희는 노루를 잃은 충격이 너무나 큰 탓에 노루를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라고 스스로 자기암시를 건다. 선희의 자기암시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다가 어느 시점 특정한 계기를 통해 이내 산산조각 난다. 이후 <아지갑>은 모녀가 둘만의 닫힌 세계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미 혼백이 된 노루와 이승에 남아있는 선희를 통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두 사람의 트라우마를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은 흡입력 있게 독자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고통당하는 피해자와 뻔뻔한 가해자

<아지갑>에서 노선희와 노루는 둘만의 세계 속에 갇혀 사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그녀들만 ‘닫힌 세계’에 사는 건 아니다. 아들들이 사촌여동생 노선희를 성폭행하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문을 닫아버린 큰엄마, 자신의 자손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죽이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자손‘만’ 잘되도록 끊임없이 복을 주는 조상의 혼백들. 자기 자식 잘되면 남의 자식이 어찌 되건 상관 않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노선희와 노루의 세계는 비록 스스로 소진되고 정신이 좀먹을지언정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후자의 세계는 오직 자신의 가족만이 부유하고 잘살면 그만으로, 타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에는 거리낌이 없다. 노선희와 노루의 세계는 이런 사람들을 피해 그들이 쌓은 안전지대인 셈이다.

노선희와 노루는 서로 더 행복해지기 위한 길을 찾아 둘만의 세계를 탈주한다. 방어막 삼아 만들어진 세계이므로 이 세계에서의 탈주 역시 둘만의 관계가 변화한다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노선희 곁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친구들, 노루를 돌봐주는 다른 혼백들 덕택에 이 세계는 비로소 열린다. 상처와 트라우마,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탐색이 이 열림의 과정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큰엄마와 조상 혼백으로 표현되는 그들만의 세계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고,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지갑>이 소환하는 건 신에 가까운 ‘무당’이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신 ‘디케’처럼 눈에 붕대를 감았다. 자기 자식만을 위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무시한 자들, 폭력을 일삼은 가해자들을 악몽에 가두어 그들이 괴롭힌 타인들과 똑같은 고통 속에 살게 한다. 독자들에게 ‘사이다’ 요소를 주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되지만 이러한 설정은 사실 ‘악몽’ 정도로밖에 심판하지 못하는 현실을 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노선희와 노루는 각자의 길에서 다른 행복을 마주하지만, 이 세계에서 제2의 노선희, 노루가 생길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달려가는데, 독자의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계속해서 남는 건 그 때문이다.

여기부터는 현실세계의 영역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데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에 비해,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을 가능성은 아주 미미하다. 경찰도 검찰도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을 입증하라고 종용할 뿐이고, 피해자는 그 자신이 보호받는다고 여겨져야 하는 곳에서마저 따가운 경멸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뿐이랴,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 공모사실을 ‘당당하게’ 자서전에 쓰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공직에 있는 데엔 영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지’까지 받는다. <아지갑>의 진짜 ‘해피엔딩’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 있다.

세계는 여전히 절망스럽지만 그래도 <아지갑>은 희망의 작품이다. 해피엔딩이어서가 아니다. 가정폭력 생존자들의 글을 엮은 책,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의 서문에서 정희진은 이렇게 말했다. “남성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삶을 장악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이 말을 빌리자면, <아지갑>은 노선희가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만화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 가운데 있었던 선희가 비로소 자신과 사건을, 딸(노루)과 엄마(경자, 선희의 엄마)를 분리하여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선희는 사회적 시선과 편견, 자책 등이 뒤엉켜 만들어낸 얼굴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자신의 얼굴을 되찾는다.

만화로 본 세상

<아지갑>의 선희는 얼굴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얼굴을 되찾지 못한 여성들이 넘쳐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여전히 해석이 필요 없는 영역으로 취급하고,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번’으로 물든 땅만 봐도 참담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지갑>과 같은 이야기는 이 척박한 땅에 단비 같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조경숙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