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덴마>-내 삶의 발목을 잡아온 것은 결국 나

우리는 자주 복수를 꿈꾼다.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그가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복수심은 자신뿐 아니라 소중한 주변인들을 함께 잡아먹고 만다.

얼마 전, 친한 친구가 나에게 모 작가의 어느 소설을 읽었는지 물었다. 대학원생 시절의 연구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 소설이었는데, 나는 논문을 쓰면서도 일부러 읽지 않았다. 왜, 하고 묻는 그에게 “내가 정말 싫어하는 선배가 그 작가로 논문을 썼거든, 그래서 그 작가와 소설도 모두 싫어졌어” 하고 답했다. 친구는 뭐 그렇다고 굳이 소설을 안 읽어,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꽤 인기가 있었던 어느 영화를 보았는지를 궁금해 했다. 보고 싶었는데 아직 보지 않았다고 하자, 그가 이유를 물었다. 그런 그에게 “그 선배가 추천한 영화인데 왠지 그 이후로 보고 싶지가 않아졌어” 하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도 나도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됐음을 알았다.

이유도 없이 싫었던 선배

나는 대학원의 어느 선배를 참 싫어했다. ‘왜’라고 물어본다면 딱히 무어라 답하기가 민망하지만, 지내다 보면 서로 ‘종이 다른’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와 내가 그랬다. 중간관리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와는 결이 잘 맞지 않았다. 다른 선후배들은 좋으나 싫으나 그와의 관계를 그럭저럭 유지해 갔지만 나는 그것이 힘들었다. 그 때문에 울면서 집에 들어가기도 했고 새벽까지 혼자 술을 마시기도 몇 차례 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쓰고 대학에서 나오면서는, 가끔은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 한 인간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그도 나에게 “너 때문에 잠을 못 잘 만큼 힘들었다”고 고백한 일이 있을 만큼, 서로 애‘증’의 관계였다. 그러나 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그와 내가 그만큼 ‘다른 인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웹툰 <덴마>를 보면서 나는 그 선배를 다시 떠올렸다. 최근 에피소드의 주인공 지로가 자신의 원수인 규오를 만나는 장면에서였다. 지로는 마약에 찌든 ‘약쟁이’다. 서사의 초반에서 그는 갱생 불가능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약을 끊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나 언제나 “그래 마지막으로 한 대만 더…”라며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사실은 규오가 자신의 개인경호원으로 지로를 영입하려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그를 감금하고 마약을 강제로 투여했다는 과거가 밝혀진다. 지로는 약에 취해 자신의 여동생을 성추행하고 교통사고를 내 남동생을 반신불수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받아왔으나, 그 역시 규오의 ‘장난’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가족이 모두 노예로 팔려가는 수모를 겪고서도, 지로는 방황을 계속한다.

양영순 작가의 만화 「덴마」의 한 장면. / 네이버웹툰

그런 지로에게 약을 끊게 한 것은 따뜻한 한 줌의 기억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올리는 별 장식, 그것에서 가족과의 단란했던 한때를 떠올린 지로는 ‘돌아가고 싶어’라며 오열한다. 물론 그 이후에도 방황을 계속하지만, 어느 계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발목을 끝없이 잡아온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우연히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해 가장 밑바닥의 죄의식을 끌어내는 행성’에 다다른 그는, 약에 취해 절벽에 매달린다. 곧 규오의 허상이 나타난다. “내 발목 잡지 말라고!” 하고 소리치자 그것은 곧 깨어져 자신의 어머니로, 동생들로 차례로 바뀌어 간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타난 자신의 허상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깨어지지 않는다.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무의식의 주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행성은 그렇게 지로에게 삶을 망치는 것도, 성공으로 이끄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는 “너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 이후 지로는 약을 끊고 망가진 몸을 단련해 나간다. 규오가 탐낼 만한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그는 몇 년 후 가장 유력한 귀족의 개인 경호대인 백경대의 일원이 되는 데 성공한다. 경호원들에게는 꿈의 직장으로 묘사되는 곳이다. 그런데 전쟁을 위해 다시 한 번 그 행성을 찾은 지로의 앞에 규오의 허상이 나타난다. 규오는 “어서 와 소중한 친구야”라며 약을 내민다. 지로가 무시하자 약은 곧 모래가 돼 떨어지지만 규오는 “피가 거꾸로 솟지? 날 찢어 죽이고 싶지 않아? 내가 너와 가족의 삶을 완전히 뭉개놨으니까” 하고 묻는다.

진정한 복수란 무엇일까

그런데 지로는 그런 규오에게 “분노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에게 내 귀한 힘과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졌다고, 너는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그동안 나를 망치고 있었던 건 너의 만행이 아니라 너 따위가 나를 망쳤다고 믿고 있던 내 망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백경대가 됐겠니? 그런 의미에서 네 말대로… 넌 정말 소중한 친구야”라고 덧붙인다. 그 순간, 규오의 허상이 무너진다. 중계를 지켜보던 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 뿐이다. 지로는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망령에서 벗어나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리고 행성의 밑바닥에 도착해 언젠가 등장했던 자신의 허상과 마주하고서는, 약에 중독되어 앙상한 그를(과거의 자신을) 감싸 안으며 말한다. “네 앞에 놓여 있던 이런저런 미래 중에 날 선택해 줘서 정말 고마워.”

「덴마」에서 지로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 / 네이버웹툰

우리는 자주 복수를 꿈꾼다.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그가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복수심은 자신뿐 아니라 소중한 주변인들을 함께 잡아먹고 만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주체로 두는 삶이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이를 삶의 주인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그러한 자기학대를 스스로 벌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삶에서 그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 진정한 복수가 된다. 지로 역시 그렇게 규오를 향한 복수심에서 벗어난다.

그저 ‘서로 다른 인간’이었을 뿐인 나와 선배의 관계를 지로와 규오의 그것으로 비교하기에는 민망하다. 그에게 복수를 꿈꾸어 본 바도 없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지금도, 나는 소설이나 영화를 선택하는 간단한 일에서조차 종종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거기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제는 굳이 그를 내 삶의 무엇과도 엮어내지 않으려 한다. 지로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 덕분에 대학을 그만둘 용기를 조금 더 얻었어, 그래서 고마워” 하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다.

만화로 본 세상

내 앞에 놓인 이런저런 미래 중에서, 나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 역시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타인에게 상처받은 우리들 모두 마찬가지다. 지로가 그랬듯 타인을 향한 복수심에 소진할 에너지를 온전히 나를 가꾸는 데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초라한 과거의 나와 대면하며 “나를 선택해주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삶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진정한 복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김민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