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을 읽는다
하타노 세츠코·최주한 옮김·소명출판·2008
이광수(1892~1950)는 현대 소설의 아버지다. 이 공적 아버지는 고마운 존재면서 흠이 많은 아버지다. 이광수는 전근대에 머물러 있던 서사 문학의 내적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수혈하면서 비로소 한국어가 자아와 세계를 동시적으로 포획하는 현대 소설에 적합한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현대를 향한 다양한 줄기들은 이광수에게 와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었고, 그것은 그대로 한국 현대 서사의 장강이 되었다. 이 장강에 기대 한국의 서사 문학은 꽃을 피웠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 서사 문학이 발아(發芽)하는 기점이자 여명의 외침이고 아울러 무시무시한 빅뱅이다. 이광수라는 빅뱅을 겪지 않았다면 한국 서사 문학의 밤하늘을 찬연히 수놓는 성좌(星座)들은 아직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런저런 흠을 가진 불완전한 아버지다. 가족(문학)을 떠나 늘 집 바깥을 떠도는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가족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계몽과 계도의 도구, 지식인의 방법적 실천, 당대 이성의 기획이라는 당위성 때문에 한계를 갖는다. 이광수의 문학은 그것이 여러 이성의 기획 중 하나일 뿐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중요한 논객이자 언론인이자 사회개혁 사상가로 살고, 그것들에 에너지를 쏟아 부은 뒤 나머지를 겨우 문학가라는 명성을 떠받치는 힘으로 삼았다. 그는 “잘 빚은 항아리” 그 자체보다 그것의 용도를 더 궁구한 사람이다. 어떤 근대인보다 문학의 가능성을 일찍이 엿보았지만 문학에 흘려보낸 수액은 턱없이 부족하고, 문학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물고 놓지 않는 야수의 열정이 부재하고, 그래서 그가 일군 심미적 이성의 골밀도는 성기고 문학의 골격은 취약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권력의 욕망들이 이글대며 타오르는 현실이라는 지옥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쉽게 녹아버린다. 이광수 문학을 다만 ‘그만의 문학’으로 남게 하는 것은 이광수의 불행이면서 동시에 현대 한국 서사 문학의 근원적 불행이다.
우리보다 앞선 외래의 것들은 아직 현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낯선 것이며, 낯선 것들은 당연히 매혹과 공포의 대상들이었다. 누군가 그 미신적인 믿음을 넘어 용감하게 그것들을 씹고 삼켜야 하는 전위가 필요한 법인데, 이광수는 현대의 들머리에서 그 전위 노릇을 선뜻 맡은 사람이다.
이광수는 트로이의 목마고, 우리 현대 서사 문학의 거푸집이며, 문지방이다. 우리는 그 트로이 목마를 타고 근대의 문지방을 넘어 현대로 건너오고, 그 거푸집을 빌려 상상력의 촉발과 변형이라는 자원을 공급받으며 무수한 문학의 집들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광수의 문학 언어는 기능 부전의 언어다. 기능 부전의 언어들은 고작해야 말의 거품들, 백일몽의 허우적거림이다. 9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읽는 ‘무정’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공허한 것은 그 때문이다.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이광수의 소설들은 마치 불이 꺼진 등대와 같다. 90년 전에 이광수의 소설들은 선진(先進)의 빛을 비추는 등대 구실을 했지만 이제 그 용도를 다한 채 불이 꺼진 등대다. 그 등대는 과거의 유물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이광수를 부정하는 일은 우리 문학의 자아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광수를 부정해야 한다. 이광수의 문학은 죽은 자의 무덤 앞에 세우는 하나의 비석이다. 영광의 빛이 사라진 뒤 비석의 뒤에는 오욕의 긴 그림자만 남는다. 비석은 우리에게 어떤 생명의 요소를 주지 못하고 다만 추념의 자리만 마련할 뿐이다.
‘무정’ 신문연재(왼쪽)와 춘원 이광수.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말기의 개화한 도쿄를 만난 이광수에게 근대 일본은 어떻게 비쳤을까. 도쿄는 이광수가 처음 목격한 서양이고, 그 낯선 세계와의 대면은 그의 내면에 커다란 각인을 남길 만큼 충격을 주었다.
놀라워라, 일본인이 쓴 ‘‘무정’을 읽는다’란 책을 처음 발견하고 내 첫 느낌이 그랬다. 저자는 일본의 한 여자대학에서 ‘한국어’와 ‘조선 사정’을 가르치는 교수다. 이 책은 이광수의 정신사의 성립 과정과 ‘무정’에 대한 매우 세밀한 분석 등을 담은 연구서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말기의 개화한 도쿄를 만난 이광수에게 근대 일본은 어떻게 비쳤을까.
도쿄는 이광수가 처음 목격한 서양이고, 그 낯선 세계와의 대면은 그의 내면에 커다란 각인을 남길 만큼 충격을 주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양 침략의 선봉기지로 만들어진 의사(疑似) 서양’이다. 근대 이전에 머물러 있는 조선에서 건너온 소년에게 ‘의사 서양’은 아마도 충격과 함께 공포와 매혹의 대상은 아니었을까. 이광수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심각함을 느꼈다고 쓴다.
왜 일본인 교수가 이광수와 ‘무정’을 10여 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을 정도로 마음에 깊이 꽂혔을까. ‘무정’이 일본 제국의 근대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인 까닭이다. ‘무정’은 이광수라는 타자가 겪은 일본의 근대 경험, 그리고 근대를 이끌던 사상과 사조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하타노 세츠코가 ‘무정’을 접하며 그 안에서 ‘젊은 시절 어딘가에서 만났던 듯한 사고방식과 정서’를 발견하고 그 낯익음에 반색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무정’은 제국의 근대와 식민지 조선이 겪은 근대를 동시에 비춘다. 이광수는 1907년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에 편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2년 반을 여기서 보낸다. 홍명희와 루쉰이 다녔고, 뒷날 김동인과 주요한 등이 다녔던 메이지학원 시절을 포함하여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소년 시절을 고스란히 일본에서 보내며 힘없는 제 조국을 일본이 집어삼키는 과정을 목격한다. 소년 이광수는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목도하며 나라를 잃은 불행을 떨치고 일어나는 길은 민족의 힘을 키우는 일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과연 이광수에게 그 시절은 “문장과 교육으로 동포를 각성시키자”는 ‘잠행적인 야심’을 굳게 다지는 시절이었다. 공리를 앞세운 이상주의를 가슴에 품은 소년다운 의협의 발로였다.
하타노 세츠코의 ‘‘무정’을 읽는다’는 한 권의 우리 근대 작가와 문학 연구서로 훌륭하다. 그 논점도 진지하고 연구의 깊이와 격조에서도 한국의 문학 연구자들의 그것과 견주어 한 치의 모자람이 없다. 저자는 ‘무정’을 이광수 자신의 ‘자기 형성을 린 교양소설’의 범주에 놓고 읽는다. ‘무정’에서 ‘내부의 용암을 ‘얇은 지각’으로 덮어 분화(噴火)를 누르는’ 작가 의 실재 자아가 투영되었다고 보고, 제 조강지처를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정체를 밝히려고 ‘무정’을 쓴 것이라고 작의를 해석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물론 내부의 용암은 본래의 자아고, 그것을 억누르는 지각은 외부 세계에 맞추어 만들어진 표층의 자아를 가리키는 것일 터다.
‘무정’에서 형식은 생명과 그 욕망이 시키는 대로 영채를 버리고 선형에게 도망간다. 형식이 작가의 분신이라면, 영채는 형식의 삶과 행동을 제약하는 인륜이라고 명명되는 근대의 도덕률일 것이다. 이광수는 근대의 들머리에서, 생명 보편의 욕망이 근대의 도덕률을 넘어서서 폭주하는 근대 이후의 ‘무정’한 문명 실체를 꿰뚫어본 것은 아닐까. 형식이 근대의 빛에 이끌린 채 욕망의 이데올로기와 반욕망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의 표상이라면, 영채는 작가 자신의 내적 자아가 품고 있는 인륜의 표상물들, 이를테면 조강지처, 미개함 속에 잠겨 있는 조국, 주권을 강제로 빼앗긴 조선 민족의 불행이다. 형식은 영채를 버리고 신식 여성 선형에게로 달려간다. 형식이 달려간 곳은 근대의 빛이 비쳐오는 곳이다. 형식을 보면 이광수를 낱낱이 알 수 있다. ‘무정’의 형식이 그랬던 것처럼 이광수를 매혹시킨 그 빛은 너무 강했던가. 일본을 통한 근대 경험에 도취해서 본래적 자아의 외침을 몰각한 채 그 빛에 너무 깊이 이끌려 간 이광수는 끝내 민족의 반역자라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