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5)평등한 노동조건과 재생산권 요구하다

미국 방위산업체 콘트롤데이타사는 1967년 컴퓨터 기억장치 생산업체인 한국콘트롤데이타사를 설립했다. 40명이던 종업원은 1969년 400명이 됐고, 매년 막대한 금액을 본사로 송금했다. 외자기업이라 임금이나 근무환경 등 노동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콘트롤데이타 노동자들은 스스로 ‘공순이’가 아니라는 허위의식도 존재했고, 회사도 이 점을 활용해 노조 결성을 방해했다. 1973년 12월 20일, 8명의 노동자가 모여 노조를 결성, 창립 3일 만에 조합원 600명을 확보했다. 76년 회사와 결탁한 지도부를 몰아내고 77년 5월 새로운 민주노조를 꾸렸고, 이 지도부가 79년 높은 지지율로 재신임을 받았다. 조합원의 지지라는 큰 힘을 확보한 노동조합은 79년 주 42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도 이뤘다. 동시에 회사의 방해, 노조 반대파의 노조 탈환시도에 시달려야했다.

1982년 콘트롤데이타 사측은 민주노조를 꺾기 위해 공장철수를 감행했다. 미국 본사는 애초 해고자 복직과 지속적인 공장운영을 원했으나 신군부가 강경하게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폐업’에 들어간 회사 건물을 나오는 노동자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조는 여성들의 차별 경험과 일상적인 남성 중심 권위주의에 저항해온 힘을 노조조직화의 중요한 자원으로 적극 활용했다. 한명희(전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 위원장)는 “여성들이 가족과 작업장 모두에서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음을 알기 위해, 또한 한 영역에서의 저항이 다른 영역에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해준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두 영역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노조가 일궈온 평등을 향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일반투쟁과제와 여성 노동자의 특수한 요구를 실현하는 일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녀임금 차별 철폐와 미혼여성의 부양가족 인정 노조 결성의 동력은 남녀임금 격차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낮은 임금의 여성 노동자에게 30%, 남성 관리자들에게 27% 인상률을 임금 인상마다 지속적으로 적용해 격차를 좁혀갔다. 회사는 ‘여성은 부양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없다’고 했지만, 1인당 실제 부양가족 숫자를 조사해보니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의 역할을 하며 평균 2.6명의 가족을 부양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노조는 사측에 3인 가족 생계비는 물론 그동안 받지 못했던 임금까지 소급해 요구했다.

생리휴가 확보와 무급화 노조의 두 번째 과제는 ‘생리휴가 매월 사용’이었다. 생리휴가를 단순히 건강휴가로만 보지 않고 여성 노동자에게 자율성을 갖게 해준다는 점을 부각했다. 회사는 생리휴가를 없애고 대신 한달에 휴가 1일을 더 주면서 격주 토요일 근무를 없애겠다고 제안했지만 노조는 거부했다. 토요일 근무 폐지는 이후 단체협상을 통해 얻어냈다.

1982년 콘트롤데이타 사측과 신군부는 민주노조 운동을 꺾기 위해 공장철수를 감행했다. 정권과 사측의 계획을 규탄하는 내용의 콘트롤데이타 노조 간행물. /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제공

결혼퇴직 임신퇴직 철폐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결혼하면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회사 일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회사에 조합원들은 “남자들은 결혼하고 다니면서 왜 여자는 안 되느냐, 미국 본사도 대부분 기혼이던데 왜 문제냐”고 반박했고, 3차례 교섭으로 결혼퇴직제를 없앴다. 노조는 산전산후휴가 적용의 모범적 선례를 만들기 위해 최장기 근속 중이던 기혼여성 김태성과 협의했다. 미혼 조합원들은 ‘창피하게 애까지 낳고 다닌다는 거 이해할 수 없다’며 동요했고, 회사도 “남편이 얼마나 못났으면 애 낳고도 직장 다니라고 하냐”며 모욕을 주며 퇴사를 종용했지만, 김태성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산전산후휴가 2개월을 받고 출산 후 출근해 출산축의금도 받았다. 회사의 사무직 출산축의금은 아들 5만원, 딸 2만원이었고, 그마저도 생산직은 무조건 2만원이었다. 노조는 출산축의금 방침을 직종, 자녀 성별에 관계 없이 5만원으로 통일하게 했다. 수유시간 확보와 직장탁아소 설치도 도모했다. 그러나 폐업으로 기혼여성과 관련한 시도는 중단됐다.

‘통근버스 사건’으로 시작된 인격 차별 대응 사소한 다툼으로 여겨지던 일들에 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일은 쉽지 않다. 노조는 개인적 다툼으로 치부되던 일들에서 정치적 함의를 발견하고 싸워나갔다. 대표 사례가 출근길 통근버스였다. 회사는 1974년부터 통근버스를 운행했고, 앞쪽 2줄 정도를 남성 관리자용으로 비워두는 관행이 있었다. 1977년 10월 어느 날 몸이 아픈 한 여성 조합원이 자리에 앉았다. 남성 관리자가 버스에 타자 비켜주었지만, ‘싸가지가 없다’는 타박을 들었고, 이 조합원이 노조를 찾아가 호소했다. 노조는 문제를 제기했고, 회사는 건방진 여자를 비호하는 노조가 문제라며 반박하며 남녀대결 분위기로 이어지는 듯했다. 노조는 논란의 흐름을 바꾸려 생산량 50% 태업을 결정했다. 태업 3일 만에 문제의 직원을 1개월 정직시키고 공개사과를 하게 했다. 이후 버스에 자리를 남겨두는 관행도 사라졌다.

콘트롤데이타 사측이 노조활동을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하자 노조가 판결이 나올 때까지 부당해고자들과 정상근무할 것이라고 밝힌 문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화장실 투쟁도 있었다. 1000여명을 넘나드는 여성 노동자가 있음에도 화장실이 20개에 불과했다. 쉬는 시간마다 조합원이 한꺼번에 나가 화장실을 들렀다가 천천히 들어가는 준법 투쟁으로 20~30분 이상 근무시간을 침해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허락을 받으라는 지시가 나오자, ‘똥 싸러 가요’, ‘오줌 누러 가요’ 하면서 허락을 받았다. 남자 관리자들이 질색하며 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직업병 연구와 대응 단층의 하얀 건물, 깨끗해 보이는 전기회사는 아무런 위험이 없어보였다. 노조는 교섭 과정에서 납과 유기용제 대량 사용 문제를 알게 됐다. 본사의 홍보물을 번역하면서 전자업체에서 사용하는 물질들이 여성의 모성적 특성과 건강에 치명적인 위협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1977년 10월 조합원 620명을 대상으로 직업병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위장병, 시력 감퇴, 납중독과 피부병 등이 발견됐다. 실태조사는 이후 지속적으로 4년 이상 진행했다. 작업실 환풍기 시설 개선, 유기용제 교체, 교체가 어려운 용제는 뚜껑을 닫을 수 있는 용기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5년 이상 납땜을 한 노동자를 다른 공정으로 전환 배치하는 것도 중요한 요구 중 하나였다. 1981년 단체협약에서는 유해작업장 근무시간은 1일 6시간, 유해작업장 근무자에게 기본급의 50% 가산 지급 등을 요구했다.

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

참고문헌 <나 여성노동자 1>, 그린비/‘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의 여성과제’, 한명희, 2011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 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