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가 위험하다고 한다. 책을 통해 자기 세계를 갖는 것, 그래서 의견이 생기고 자기주장을 하는 여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 싸움을 걸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1970년대 한 가발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
1970년대 여공의 수기들은 여성이자 노동자로 살아가며 겪었던 경험을 담고 있다. 여성 노동자를 배제하는 세상, 혹은 포함하더라도 그들 자신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존재로 제시하는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며,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힘을 얻고자 여성 노동자들은 글을 썼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여공이라는 ‘괴물’
대표적인 여성 노동자의 수기는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인데 이들은 모두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글쓰기는 싸움의 기록이다. 여공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글 쓰는 노동자는 무엇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 그들은 세상과 논박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도 아니 되고, 여자는 얌전하고 교양 있게 얘기를 해야 하며 행동도 조용해야 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무언가? 자로 잰다면 우리는 여자로선 제로 아닌가. 큰소리로 하지 않으면 말이 전달이 안 되고, 작업복을 입고 분주하게 기계 사이를 오가며 일해야 하니 자연히 행동이 덤성덤성하다. 이 나라의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해 밤잠도 못 자고 땀 흘리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공순이라는 천시하는 명칭과 세상에서 말하는 여자다움이 박탈되는 거라면 우린 뭔가? 누구를 위해 일하며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빼앗긴 일터> 42~43쪽)
1970년대 여공들은 주로 농촌을 떠나 빈한한 가정 살림을 책임지려 도시로 이주한다. 제도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학교에 다녔더라도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정도라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나이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과 외부 종교단체가 제공하는 교육프로그램과 도서실 등의 자원은 이들에게 매력적이었을 테다. 이들을 매료시킨 ‘배움’은 가족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을 향했다. 출세나 명예를 위한 지식을 향하지는 않으면서도 문학가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했다.
1970년대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장을 비롯한 어느 곳도 온전히 자신들의 장소가 될 수 없음을 토로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여성으로, 일상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경계의 사람들이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이 거부된’ 존재이자 어느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견주어 ‘여공’을 설명했다. 국가는 산업역군이라고 추어올렸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공장 다니는 여자애’ 취급을 받았다. 남성과 같은 조건에서 일하지만 급여는 낮았고, 결혼하면 그만둘 임시 노동자였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공순이라는 무성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남자들에게 농락당하기 쉬운 여성’이라는 취약한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성적 대상이 되곤 했다. “우린 뭔가?” 장남수의 질문은 여공에 대한 단편적이고 편견어린 인식이 본인이 경험한 현실과 고민을 다 드러내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주장이자,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문학도 아닌’ 글을 쓰는 여공이 만든 틈
“헤르만 헤세, 하이네, 윌리엄 워즈워스, 바이런, 괴테, 푸시킨. 이 얼마나 훌륭한 이들의 이름인가?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그들은 훌륭하다. 아, 나도 그들의 이름 틈에 끼고 싶다. … 감히 내가 저 위대한 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짐승이 웃고 저 하늘의 별이 웃을 것을 모르고… 아무 지식도 배움도 없는 나는 도저히 그런 영광을 가질 수 없다. 이대로 그날그날 천천히 밥이나 처먹으면서 사는 거지. 그리고 끝내 돼지 같이 죽는 거야.”(<인간답게 살고 싶다> 석정남 수기 중)
친구들이 오기 싫어할 정도로 거리가 먼 곳에 홀로 살기를 원하던 석정남은 혼자 있는 시간에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장남수는 구속돼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일기를 쓰지 못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탐색하고 자기를 드러내며 동시대 ‘여공’을 재현하는 지식인들의 방식에 틈을 만들었던 이들은 여성 노동자 앞에 놓인 노동현실을 고발하라는 ‘대의’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저자되기’를 욕망한다.
창작과비평사/형성사 /일월서각
석정남은 2편의 소설을 썼다.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의 위기에 놓인 옥순의 이야기를 담은 <장벽>과 그 후 주부가 된 옥순이 노동운동에 열심인 동료를 지켜보는 과정과 내면의 흐름을 담은 <불신시대>, 두 작품은 당시에 소설답지 못하다며 냉랭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불신시대>는 ‘큰일 하는 운동가 남편’과 ‘무지하고 살림만 하는 아내’라는 관계의 도식을 뒤엎으며, 남편보다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기혼 여성을 제시해 주류 노동소설의 문법을 비껴간다. 보편이 아닌 예외이지만, 그 예외성 자체가 노동소설의 역사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작가가 됐다. ‘어디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은’ 존재들의 글쓰기는 수월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글을 썼지만, 그 글에는 끝없이 사회적 통념과 갈등하며 고민한 흔적도 담겨 있다. 글쓰기를 통해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동료 시민과 연결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연결을 통해 다른 싸움을 하는 동료들과 만나고 연대하면서 소속감을 얻어갔을지도 모른다.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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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