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위키리크스 외교문서]“미국입장 관철시키려 죽도록 싸웠다”는 한국관료

위키리크스 공개 외교문서에서 드러난 ‘친미행각’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7월 24일 오후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 발표에 대해선, 미국 정부에 미리 알리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미국이 의미있는 코멘트를 할 시간을 주며 자유무역협정(FTA) 의약품 작업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이 관철되도록 죽도록 싸웠다(fighting like hell)고 말했다.”

9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위키리크스 문서 공개로 드러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과정 및 한·미 FTA 협상 과정의 진실에 대한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정부의 정책을 규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참여정부 당시인 2006년 7월 25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작성한 외교전문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현 삼성전자 해외법무 사장)은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미국이 반대하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추진하자 미국 측에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을 미국에 설득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되레 미국 정부의 입장을 한국에 관철하려고 “죽도록 싸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지난 9월 2일 25만여건의 미국 외교전문을 공개했다.

외교전문을 통해 하나둘씩 공개되고 있는 한국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보면 외교 담당자 간의 정상적인 업무협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일종의 ‘친미 행각’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성공단 내부 혼선 사전에 알아
버시바우 대사가 2006년 6월 14일 작성한 외교문서를 보면, 조태용 당시 외교통상부 북미국장(현 호주 대사)은 개성공단과 관련해 청와대와 한·미 FTA 협상 담당자인 김종훈 당시 수석대표 간에 이견이 있다고 미 측에 알렸다.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사흘 전인 11일 조 국장을 만나 개성공단이 한·미 FTA에 포함되는 데 대한 우려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당시는 한·미 양국이 워싱턴에서 한·미 FTA 1차 공식협상을 마무리한 때로 청와대와 여당은 “개성공단을 한·미 FTA의 핵심적인 이슈로 삼아야 한다”며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을 미 측에 강력히 요구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북한 노동자의 노동권, 낮은 임금 등을 거론하며 우려를 표하던 상황이었다.

외교전문은 “조 국장은 한국 측 협상 담당자인 김종훈 수석대표가 ‘정치적인 문제(개성공단)를 마지막으로 미루려고 한다’는 생각을 자신(조 국장)에게 개인적으로 말했다는 내용을 스티븐스 수석부차관보에게 분명히 말했다”고 전했다. 또 “김종훈 수석대표는 서울(청와대)로부터 협상시 최초 요구에 개성공단 이슈를 포함시키라는 확고한 훈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협상에서 개성공단 이슈를 협상의 최전선과 핵심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고 조 국장이 전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한국 내부에서 개성공단과 관련해 혼선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미 협상단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지위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절치 못한 발언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다.

미대사관 관계자에 대통령 동향 전해
또 청와대 관료가 한·미 FTA 및 쇠고기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의 내부 정보를 미국 대사관에 일일이 보고한 사실도 공개됐다. 버시바우 대사가 2007년 9월 4일 본국에 보고한 기밀 외교전문에는 ‘Presidential Assistant Secretary for Economic Policy Kim Seung-ho’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경제정책실에 있던 김승호씨는 9월 7일 시드니에서 한·미 양자회담이 열리기 3일 전, 미 대사관 관계자를 만나 노 전 대통령의 동향을 전했다. 김씨는 대사관 직원에게 “FTA 문서가 노 대통령의 책상 위에 있으며 오늘 중으로 사인을 할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대사관 직원에게 “한국에선 비준을 하기 위해 한·미 합의안을 미리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며 “노 대통령이 7일 부시 대통령을 만나 이를 알릴 것”이란 사실도 미리 귀띔해줬다. 김씨는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쇠고기 뼈와 관련해 받게 될 ‘가상의 질문’에 대한 논점도 준비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일본과 대만에 하는 것처럼 한국에도 해달라”는 말을 준비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김씨에 대해 “한·미 FTA 및 쇠고기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내부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소중한 취재원(valued contact)”이라며 “이 취재원을 강력히 보호해야 한다(strictly protect)”고 적어놓았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한나라당)이 이 대통령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이고 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미 대사관 측에 말했다는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2008년 5월 29일치)도 있다.

물론 외교전문에 기재된 미 외교관의 보고는 주관적일 수 있고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고위 관료, 교수, 국회의원 등을 만나 본국의 정책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작성된 문건인 만큼 나름의 객관성이 있으며 특별히 왜곡을 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지점은 ‘그들만의 밀실’에서 국민들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산 쇠고기 개방과 같은 의제들이 물밑에서 논의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나간 일이라거나 미국의 일방적인 해석이라는 식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위키리크스의 전문에 나오는 한국의 통상협상 책임자 및 고위 공무원들에 대해 감사원 감사 등 정부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범국본 측은 “국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은 FTA 비준안을 9월 국회에 상정하는 게 아니라 위키리크스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무수한 의혹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지난 9월 15일 한나라당에 위키리크스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박주선 최고위원도 전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위키리크스 국정조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이두아 대변인은 “위키리크스 내용은 근거도 물증도 없다”며 “그것만으로 국정조사나 청문회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거부 입장을 밝혔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