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이 만난 사람]천성관 낙마시킨 박지원 의원

“제보자 조사하는 것은 망하는 길”

천당에서 지옥으로, 다시 지상으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의 지난 10년간 인생역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대중 정부 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2인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누렸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옥살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 정부 말기 겨우 풀려나 사면·복권이 되었고 지난해 4월 총선때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해 당선,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영욕이 교차하는 경우는 한국 정치사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진폭이 크면서 드라마틱한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권불십년(權不十年)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을 온 몸으로 보여준 이가 박 의원이다. 그가 감옥을 오가면서 한 말도 유명하다. 수감될 때 그는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 구절을 따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고 했고, 사면되었을 때는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고 부활을 예고했다.

그런 그가 지난주에는 청문회 스타가 됐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자료를 들이대며 궁지로 몰아넣은 끝에 낙마를 이끌어낸 것이다. 국회의원이 무엇을 얼마나 심도있게 준비하고 파헤치느냐에 따라 세상이 바뀔 수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준 사례다.

박 의원은 이런 귀중한 자료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이번 주 인터뷰 대상자로 박 의원을 선정한 것은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자료입수 경위가 사안의 본질은 물론 아니지만 그 전후 이야기를 듣다보면 청문회의 의의와 재기에 성공한 ‘국회의원 박지원’의 진면목이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이번 청문회에서 송곳 같은 질문으로 천 후보자를 매섭게 몰아붙였습니다. 박수 많이 받으셨죠?
“저 혼자 한 게 아니고요, 민주당 법사위원회 위원들이 팀 플레이를 잘한 덕분입니다.”

자료는 어떻게 입수한 겁니까.
“열심히 뛰어서 얻었지요. 그러나 기자가 취재원을 밝힐 수 없듯이 제가 제보자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듣자하니 사정기관에서 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AK면세점이 모 그룹 소유이기 때문에 저와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 사실은 롯데·동화 면세점에서 더 많이 구입했는데 AK자료가 부각됐다, 이런 식인 것 같아요. 이런 거 왜 조사합니까. 나쁜 짓 안하면 되는거지, 밝혀졌다고 해서 조사하고 다니는 것은 또 망하는 길입니다. 이거 꼭 써주세요.”
출처를 공개할 것으로 기대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지만 의외의 소득이 있다. 사정기관에서 조사 중이라는 사실이다. 조만간 이와 관련해 한바탕 공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 후보자의 행적과 관련해 관세청에서 허위자료를 줬다고 했는데요.
“자료를 요구했는데 내용이 다르거나 누락시키는 등 사실과 다른 것을 줬으니 허위자료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제가 허위자료라고 했는데 관세청에서 아무 말도 못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 사안 아닌가요.
“그렇죠. 당에서 적절한 조치가 있겠죠. 앞으로 문제삼을 것입니다. ”

하나 더요. 청문회에서 계속 거짓말 하면 매일 하나씩 공개하겠다고 했잖아요. 가지고 있는 미공개 팩트들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 정서에 이미 물러간 사람, 망자에는 부관참시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청문회 다음날 오후 모 고위층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서 지명철회하는 것이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라고 충고했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그렇게 조목조목 자료를 들이대며 잘 하느냐 나도 TV를 봤는데 나쁜 사람이다’고 해요. 제가 웃었지만 그때 감지를 했죠.”

국정운영의 경험에 비춰볼 때 천성관 후보같은 사람을 왜 지명했을까요. 사전에 검증이 안 되나요.
“한마디로 국민을 얕본 겁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료만 차단시키면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조금 상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까 면세점 자료 추적 얘기했는데 그게 뭡니까. 제가 여러 경로 얘기를 하면 그쪽에서도 또 조사 시작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지금 폭로전할 군번은 아니잖아요. 다만 국민의 정부 중심에 있던 사람으로서 신중하게 말한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저는 국민의 정부에 무한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실 아닌 것을 과대포장해서 말하면 다음에 누가 저를 믿겠습니까.”

국정원이 북한의 후계자 정보, 사이버테러 관련 정보를 의원들에게 설명한 것을 두고 “국정원이 친절한 금자씨가 됐다”며 힐난을 했습니다. 대북정보를 정권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오늘 아침 신문에 해커 서버가 영국에 있다는 보도가 났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은 조사도 않고 사이버 테러의 진원지가 북의 소행이라고 했어요. 국회 정보위에서 제가 ‘증거 있느냐’고 물으니 IP추적을 해봐야 한다고 해요. 그러면 그때 가서 말해야지 왜 미리 말합니까. 유신·5공 때 문제만 터지면 북의 소행이라고 하던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때 국민은 속았지만 민주정부 10년 살아온 국민은 이제 안 믿습니다. 친절한 국정원이 아니라 한심한 국정원이라 해야겠어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햇볕정책 해보았지만 북한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10년간 북한에 퍼주기를 해서 핵 개발을 도와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다. 북핵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된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뿌리가 김영삼 정부 아닙니까. 미국은 그동안 북한에 100만톤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미국이 북핵 도와주는 나라입니까. 북핵에 가장 반대하는 나라인 중국도 북한에 작년 12억달러 무상원조를 했습니다. 이것도 핵개발 원조입니까. 왜 그렇게 경직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대북 문제가 나오자 그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 오바마 미국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이 후보시절 ‘김정일과도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취임해서는 북한에 시선 한 번 안 줬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억울하겠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체제안정 꾀하고 기업투자 받아서 잘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안되니까 다시 벼랑끝 외교를 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러고보니 박 의원이야말로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을 읽어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대북특사로 비밀리에 방북, 김 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 책상에는 김 위원장과 어깨를 맞대고 앉아 소곤거리듯 대화하는 사진이 놓여있다. 그가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북한은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공식 성명을 낸 적도 있다. 그만큼 그는 남북관계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다. 오죽하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박 의원에게 “아직도 대북 핫라인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을까.

“야당은 꼭 이기라고 뽑아준 게 아닙니다. 지더라도 국민이 아시면 됩니다. 맞아죽든 굶어죽든 국민이 그 사정을 아시면 지고도 이기는 게 됩니다. 이번 청문회 보세요. 국민께 알려드리니까 우리가 이기지 않습니까.”

실제 핫라인이 아직 있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게 있을 수 없죠.”

북한에서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연락을 해오는 것도 없습니까.
“꼭 그렇게 국가보안법 위반자처럼 몰고 가야겠습니까. 소이부답(笑而不答·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음)하겠습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대답이다. 대북문제는 여야 당파를 초월하는 민족문제인 만큼 박 의원의 자산이 있다면 정부와 공조하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 즈음에서 말머리를 민주당 안으로 돌려보자.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5가지 요구를 내걸고 등원을 거부하다 최근 이렇다할 소득없이 등원을 결정한 바 있다.

애초부터 등원론자였는데 그간 원외 투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강래 ‘원내대표’를 뽑았지 ‘원외대표’를 뽑았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야당의 최대 투쟁장소는 국회예요. 필요하면 장외투쟁도 해야겠지만 그것에만 기대서는 안됩니다. 노 전 대통령이 500만명을 불러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민주당을 도와준 것이지요. 그로부터 한달이 흘렀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고구려 시대 살수대첩이 됐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살수대첩이라니요.
“AI 발생 보도가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날부터 닭고기 판매가 뚝 그칩니다. 양계업자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죠. 그러면 정부가 나서서 먹어도 괜찮다고 강조합니다. 장관들은 시식회를 갖죠. 그 다음 기업들이 닭고기를 팔아줍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국민들은 언제 AI 있었냐는 듯 다 먹어요. 노 전 대통령 서거도 한달 사이 까마득한 옛날 얘기가 됐다, 이런 말입니다.”

야당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야당은 꼭 이기라고 뽑아준 게 아닙니다. 지더라도 국민이 아시면 됩니다. 맞아죽든 굶어죽든 국민이 그 사정을 아시면 지고도 이기는 게 됩니다. 이번 청문회 보세요. 국민께 알려드리니까 우리가 이기지 않습니까.”

민주당 지지율이 한때 한나라당을 추월하다가 다시 떨어진 이유가 국회를 등졌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다음 번에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을 얼마로 보십니까.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지난번 공정택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서울시내 25개 선거구 중 17곳에서 민주당과 공감하는 후보가 이겼습니다. 희망의 싹이 보인거죠. 그 다음 경기도교육감선거에서는 그런 후보가 이겼습니다. 4월 재보선에서는 민주당이 승리했습니다.”

뚜렷한 주자가 안보이는데요.
“한나라당에는 박근혜 전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정몽준 의원 같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민주당에는 정세균 대표가 잘하고 있지만 혼자예요. 손학규·김근태 전 대표가 오는 10월 재보선에 나와야 합니다. 정동영 의원도 돌아오고요. 그래서 당내에서 자갈이라도 굴러다녀야합니다. 부딪히면서 소리도 내야 하고요. 그러다보면 외부영입도 가능합니다.”

친노신당 얘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친노그룹에서 신당 얘기가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염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명분을 만들어주면 다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이미 민주당에 들어와 있고요,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전 장관은 민주연대세력으로 독자적 활동을 더 할 것 같은데 선거를 통해 들어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통합해서 성공하고 분열해서 실패했는데 같은 실수를 두번 하면 바보지요.”
이렇게 말하지만 그에게 있어 노무현 정부 5년은 간난고초의 시절이다. 노 정부 첫 해인 2003년 6월 대북송금 특검팀에 의해 구속돼 2007년 2월 풀려날 때까지 4년여간 감옥살이를 했다. 기업인 자금 1억원을 받은 사실 외에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았다는 당초 적용된 뇌물 혐의는 무죄로 최종 판명됐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

노 정부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감옥간 충격으로 건강이 나빠져 수술을 13번 받았습니다. 그 스트레스로 제 처도 4번 수술받았고, 지금도 누워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죠. 그래도 감옥에서 성경을 구약 신약 두번 반 읽으면서 다 용서했습니다. 원한을 품으니까 저주가 오고 용서를 하니까 축복이 오더군요.”
여기서 저주는 건강악화를, 축복은 사면을 말한다. 마지막까지 손 봐야 할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 것마저 털고 나니까 사면소식이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근본적으로 우리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의 정리가 됩디다.”
실제 그는 민주당에서 노 전 대통령의 방문조사를 가장 먼저 주장했고 불구속기소를 위한 서명운동도 벌였다. 얼마전에는 권양숙 여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직대통령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친노세력과의 관계를 그는 부부관계에 비유한다.
“부부사이에 싸움 한번 한다고 이혼하지는 않잖아요. 나이 들면 애정은 간 곳 없고 의리만 남아서 사는 부부가 많습니다. 그런데 더 살다보면 애정이 새록새록 나오기도 합니다. 부부란 게 그런 거 아닌가요.”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