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사회개혁 문화운동 펼친 ‘취음선생’ 백거이

문학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려던 의지가 꺾인 뒤 백거이는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를 짓게 된다. 젊은 시절 백거이의 시에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긴 유교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시기의 시에는 불교적·도교적 색채가 짙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백거이, <술을 마주하고(對酒)>

인생이란 달팽이 뿔 위처럼 ‘좁은 공간’에서 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것,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말고 그저 즐겁게 웃으며 살자. 이 시는 백거이(772~846)가 일흔이던 841년에 쓴 것이다. 이 시를 쓴 지 5년 뒤 백거이는 세상을 뜬다. 당 선종(宣宗)은 그를 애도하는 시(<백거이를 애도하다(弔白居易)>)에서 이렇게 말했다. “뜬구름처럼 매이지 않으니 이름은 거이(居易, 편안함에 거하다), 조화무위(造化無爲)하니 자는 낙천(樂天)이라. 어린아이도 <장한가(長恨歌)>를 읊조릴 줄 알고, 오랑캐(胡兒)도 <비파행(琵琶行)>을 노래할 줄 아네.”

백거이는 그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짓고자 했다. 그는 시를 짓고 나면 이웃집 노파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쳤다고 한다. 시를 풍자와 교화의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백성의 뜻을 전달하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시, 이런 시를 통해 사회·정치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거이의 이런 문제의식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원진·장적(張籍)·왕건(王建) 등과 함께하는 ‘신악부(新樂府)운동’이라는 일종의 문학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현실을 꼬집고 시대의 폐단을 질책하는 내용의 시 창작이 권세가에게 눈엣가시였음은 물론이다. 백거이의 시를 보고서 권세와 돈이 있는 자는 안색이 변했고, 집정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격분했고, 병권을 쥔 자는 이를 갈았다. 결국 원화(元和) 10년(815), 백거이는 모함을 받아 강주(江州)로 좌천된다. 암울한 정치 현실 속에서 신악부운동 역시 좌절되고 만다.

백원의 백거이 무덤

백거이 흔적 가득한 향산사와 백원
문학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려던 의지가 꺾인 뒤 백거이는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를 짓게 된다. 젊은 시절 백거이의 시에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긴 유교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시기의 시에는 불교적·도교적 색채가 짙다. 앞서 소개한 <술을 마주하고>에 보이는 달관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삶의 경지였으리라. “곤궁해지면 홀로 자신을 잘 지키고, 영달하면 천하를 더불어 구제한다”(<맹자>)는 독선기신(獨善其身)과 겸제천하(兼濟天下), 이는 중국 지식인의 삶의 방식이었다. 겸제천하를 꿈꾸었던 백거이는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결국 독선기신하며 살아갔다. 뤄양은 바로 백거이가 독선기신하던 삶의 장소다.

58세가 되던 해(829)에 뤄양에 정착한 백거이는 ‘취음(醉吟)선생’이라는 호를 쓰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지냈다. 2년 뒤 그의 가장 친한 벗 원진이 세상을 뜬다. 백거이는 원진의 묘지명을 써주고 받은 돈으로 향산사를 보수하고,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호를 쓰면서 불교를 독실하게 믿으며 지냈다. 일흔다섯에 세상을 뜬 그는 뤄양 향산에 묻혔다.

용문석굴의 동산인 향산에 있는 향산사와 백원(白園), 백거이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수교를 건너 동산 석굴을 둘러본 뒤 향산사와 백원을 차례대로 보는 방법도 있고, 이수를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다리인 용문교를 건너서 백원부터 먼저 살펴보는 방법도 있다. 여기서는 백원을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향산사 구로당

백원은 백거이의 묘원이다. 백원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 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청윤(聽伊)’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만년의 백거이가 벗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시를 짓던 곳이다. 정자를 지나 더 올라가면 ‘낙천당(樂天堂)’이 나온다. 이곳에 있는,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백거이의 좌상이 매우 인상적이다. 낙천당에서 더 올라가면 비파봉 정상이다. 바로 이곳에 백거이가 잠들어 있다. 무덤 앞에는 ‘당소부백공묘(唐少傅白公墓)’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덤 옆에는 <취음선생전>이 새겨진 거대한 자연석비가 있다. <취음선생전>은 백거이의 자서전 격인 작품으로, 뤄양에서의 만년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술에 취하여 시를 읊는다는 ‘취음(醉吟)’의 의미처럼, 백거이는 술을 좋아하고 거문고에 탐닉하고 시에 푹 빠져 지냈다. 그와 교류하는 이들은 산수를 함께 즐기는 벗, 시를 함께하는 벗, 술을 함께하는 벗이었다. 그는 뤄양 안팎의 도관과 사원, 산수가 빼어난 곳을 죄다 찾아다녔다. 가마 안에 놓인 것은 거문고와 베개, 그리고 도연명과 사영운의 시집이었다. 가마 좌우에 술병을 걸어 놓고 산수를 유람하면서 거문고 타고 술 마시며 흥이 다할 때까지 즐기다가 돌아오는 생활, 이것이 취음선생 백거이가 스스로 묘사한 만년의 삶이다. 가족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충고하자 취음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본래 사람의 개성이란 중립적이기 어려운 법이니,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게 마련이다. 만약 불행히도 내가 재물을 탐하여 부자가 되었다면 화를 초래해 생명마저 위험해졌을 것이다. 또 만약 불행히도 내가 도박에 빠져 파산했다면 처자식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을 것이다. 또 만약 불행히도 내가 연단술에 빠졌다면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다른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런 것들에 빠지지 않고 술과 시에 만족하며 맘대로 지내는 게 훨씬 낫지 않느냐?”

백원 낙천당의 백거이 좌상

향산사의 역사, 측천무후에서 양청우까지
취음선생의 무덤 곁엔 우리나라 백씨 종친회에서 세운 기념비도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시길. 무덤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비파행>이 새겨진 석각도 있다. <비파행>은 백거이의 대표작이거니와 이 시에 나오는 비파 타는 여인의 기구한 인생이 백거이의 삶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에, <비파행>이 새겨진 석각을 보면 특별한 감회가 든다. 원화 10년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그 이듬해 가을밤, 백거이는 손님을 배웅하다가 배에서 나오는 비파 소리를 듣게 되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여인은 본래 창안(장안)의 이름난 기녀였는데 나이가 들어 초췌해지자 상인의 아내가 되었고, 남편이 장사하러 외지로 떠나자 빈 배를 지키고 있던 차였다. 백거이는 여인의 사연이 담긴 비파 연주를 들으며 적삼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중앙의 관리였다가 폄적된 자신의 신세가 그 여인의 불운한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파 소리를 듣던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사십대의 백거이, 뤄양에서 술과 시에 빠져 지낸 오육십대의 백거이, 백원에 묻힌 칠십대의 그가 속삭인다.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백원 남쪽에 자리한 향산사는 북위 희평(熙平) 원년(516)에 세워진 절이다. 향산사는 인도의 고승 지바하라가 묻힌 곳이자 중국 선종의 제2조 혜가선사가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향산사가 융성기를 맞게 된 것은 측천무후에 이르러서다. 천수(天授) 원년(690), 측천무후가 주왕조를 세운 뒤 무삼사(武三思)의 주청에 의해 향산사의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뤄양을 수도로 삼은 측천무후는 향산사를 즐겨 찾았다. 향산사는 ‘향산부시탈금포(香山賦詩奪錦袍, 향산에서 시를 지어 비단옷을 빼앗다)’의 일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당시기사(唐詩紀事)>에 의하면, 측천무후가 용문에 노닐러 왔다가 신하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면서 가장 먼저 짓는 이에게 비단옷을 하사하겠다고 했다. 동방규가 가장 먼저 시를 완성해 비단옷을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어서 송지문(宋之問)의 시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송지문의 시가 동방규의 시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결국 동방규에게 하사했던 비단옷을 다시 빼앗아서 송지문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향산사의 석루(石樓)가 바로 ‘향산부시탈금포’ 일화의 현장이라고 한다.

향산사 장·쑹 별장

안사의 난 이후 향산사는 오래도록 방치되었다. 이를 다시 보수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이가 바로 백거이다. 그는 향산거사를 자처하며 이곳을 자신의 최종적인 귀속처로 여겼다. 74살이 되던 해에 백거이는 호고·길교·정거·유진·노정·장혼과 함께 ‘상치칠노인회(尙齒七老人會)’를 결성했다. 이어서 백세의 이원상과 95세의 여만(如滿) 스님이 가입해 ‘향산구로’가 된다. 향산사 구로당(九老堂)에는 의기투합하여 노년의 은거생활을 함께했던 향산구로의 화상이 걸려 있다.

백거이 덕분에 향산사가 활기를 되찾은 것도 잠깐이었다. 이후 향산사는 오래도록 다시 방치되었다가 청 강희 연간에 비로소 보수되었다. 이후 건륭제가 향산사에 들렀다가 “용문 10사(寺) 가운데 제일은 향산”이라고 향산사를 칭송했는데, 향산사 ‘건륭어비정(乾隆御碑亭)’에 있는 석비에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청나라 말에 향산사는 다시 황폐해진다. 그리고 1936년, 향산사 남쪽에 이층짜리 건물이 세워진다. ‘장·쑹 별장’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36일 동안 지낸 곳이다. 1936년 10월 31일은 장제스의 50세 생일이었다. 생일에 사람들의 축하를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것을 ‘피수(避壽)’라고 하는데, 장제스는 피수를 구실로 10월 29일에 뤄양으로 왔다. 장·쑹 별장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는 장쉐량(張學良)·옌시산(閻錫山)·푸쭤이(傅作義) 등이 초대되었다. 공군기 50대가 뤄양 상공에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자를 그렸다. ‘피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떠들썩한 생일이었다. 장제스는 50세 생일을 맞이한 감회를 발표한 것과 더불어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를 강조하면서, 공산당 토벌에 적극적이지 않은 부하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장쉐량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을 것이다. 장쉐량은 내전을 멈추고 일치단결해 항일에 힘쓰자고 장제스에게 간언했지만 도리어 질책을 당했다고 한다. 장쉐량이 공산당을 토벌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제스는 12월 4일에 직접 시안으로 가서 공산당 토벌을 독려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안사변’이 터지고 만다.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장제스를 시안 화청지에서 납치·구금한 채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 것이다. 장·쑹 별장에서 밖을 내다보면 용문석굴의 서산 석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머물던 36일 동안 장제스는 오로지 공산당을 토벌하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리라. 이수 건너편의 수많은 불상이 건네는 자비의 메시지는 그의 마음에 들어설 자리가 없었으리.

장제스의 별장은 훗날 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楊成武, 1914~2004) 장군의 감옥이 되기도 했다. 양청우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린뱌오(林彪) 집단의 박해를 받아 비밀리에 향산사에 구금되었다. 그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2년이 넘도록 이곳 이층에 갇혀 지내며 아래층으로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 괴로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공교롭게도 당시 그의 나이는 백거이가 뤄양에 정착했을 때의 나이와 비슷하다. 물론 백거이에게 이곳은 위안과 해탈의 장소였으나, 양청우에게 이곳은 박해와 고난의 장소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겼으리라.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하면서 요행을 바란다.(君子居易以俟命, 小人行險以僥倖)”(<중용>)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樂天知命故不憂)”(<주역>) 거이(居易)와 낙천(樂天)이라는, 백거이의 이름과 자의 유래다. 편안한 위치에 거한다는 것은 평범한 도를 실천하는 삶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식적인 삶이다. 상식적인 삶을 살면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라면 달팽이 뿔 위에서 다툴 일 없이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 수 있으리.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