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길을 잃었다’보다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은 길치인 나를 신기해 하지만 빠르고 쉽게 길을 찾는 ‘똑똑이’들이 나에게는 더 신기하다. 어떻게 기계를 비롯해 모든 걸 쉽게 확신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25년 넘게 살고 있는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걸어서 10분 거리. 길 건너 시장엘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해를 못할 테지만 길치에게 길이란, 갈 때와 올 때가 다른 법이다.

그래, 나는 ‘길치’다. 요즘에는 약속 장소를 정하면 지도 링크나 이미지를 보내주며 찾아오라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면 나는 ‘멘붕’ 상태가 된다. “지도를 보고 찾아오면 되잖아” 할 테지만 나에게 지도란 조금 복잡해 보이는 ‘그림’일 뿐이다. 어찌 어찌해 지도를 읽었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스마트폰을 지팡이 삼아 더듬더듬 걸으며 ‘이 길이 맞는 걸까?’ 고민하다가 결국 경로를 이탈해 딴 길로 가는 게 바로 나란 인간이다. 한참 길을 찾다가 지인에게 전화를 걸면 대략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나-“길을 못 찾겠어.”
지인-“근처에 뭐가 보여?”
나-“신호등.”
지인-“그건 어디에나 있는 거잖아!!! 보이는 큰 건물이나 가게 이름을 이야기해봐.”
나-“응. OOO이 보이는데?”
지인-“아, 그러면 왼쪽 길로 들어와서 첫 번째 골목에서 꺾으면 XXX가 보일 거야. 그 건물 끼고 돌면 있어.”

대충 설명을 듣고 일단 통화를 종료한 나는 고민에 빠진다. 여기서 왼쪽이란 어느 방향에서 왼쪽일까? 건물을 등지고 왼쪽일까, 건물을 마주보고 왼쪽일까? 첫 번째 골목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첫 번째’인 걸까? 다시 전화 걸어 물어보기는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시간이 지나간다. 결국 ‘손바닥에 침 뱉은 후 튕겨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다 보면 나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존재론적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며칠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잠시 제주도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김포공항에 가야 했다. 우리 집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려면 중간에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한다. 길치인 나는 이 노선을 (당연히) 맨날 까먹고 검색을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지도’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첫 번째 버스에서 내려 두 번째 버스를 기다리는데 뭔가 느낌이 쎄~ 했다. 길치에게도 눈치란 있는 법!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류장에 붙은 노선도를 살펴보니 믿었던 지도가 나를 반대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길치인 나에게 사람들은 “지도를 믿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 경우 그 지도를 믿었더라면 나는 뜻하지 않게 서울 시내 관광 한 번 제대로 할 뻔했다. 만약 늦어서 비행기를 못 탔다면 그건 길치인 내 탓일까, 잘못 알려 준 지도 탓일까.

어제는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명동에 갔다. 예전 사무실이 있던 곳이어서 나름대로 익숙한 곳이라 생각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낯선 간판이 들어서 있었다. 그 가게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인터넷 지도가 ‘뒤늦게’ 알려줬다. ‘미리’ 검색을 하지 않은 탓에 나는 또 영락없는 길치가 됐다.

사람들은 길치인 나를 신기해 하지만 빠르고 쉽게 길을 찾는 ‘똑똑이’들이 나에게는 더 신기하다. 어떻게 기계를 비롯해 모든 걸 쉽게 확신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사람보다 정직하다는 기계나 지도, 통계란 결국 사람이 입력한 결과를 반복/재생할 뿐이지 않은가? 이런 ‘확신’은 결국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관용은 회의가 낳은 딸”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걷는 길이 맞는지 회의하며 한 번 더 확인하는 사람, 길을 잃어버려 본 사람이 타인의 사정을 더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어쩌면 지도 어플이 아니라 길을 잃을 기회나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로 자주 길을 잃는 나는 이제 ‘길을 잃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단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다. 조금 느릴 뿐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늦을지언정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