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과 수심의 삶, 더 크게 그들 가족의 삶에는 크고 작은 불행이 연속된다. 그런데 <숨비소리>는 비극을 선택하지도, 희극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슬픔은 위로하고, 어려움은 함께 나누어야 사람이라고 배웠다. 가난과 상처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는 도움과 위로를 건네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문제’라고 몰아댄다.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 남의 탓만 하지 마, 굶어죽는 이들이 많은 다른 나라를 보라고, 그냥 좀 조용히 살자. 위로 대신 조롱이 난무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많이 이상해졌다. 진짜 아픈 건 세상이다.
![[만화로 본 세상] <숨비소리>-가난과 슬픔에서 겨우 내뱉는 숨 한 조각](http://img.khan.co.kr/newsmaker/1108/20141231_56.jpg)
가난과 폭력으로 상처받은 모녀 이야기
그러니 상처를 속으로만 삭인다. “얼마만큼 힘들어야 / 얼마만큼 아파야 /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만화 <숨비소리>의 주인공 경복의 독백이다. 이 독백은 우리 시대 수많은 이들의 독백이기도 하다.
만화는 독자를 위로한다. 우스꽝스러운 바보들을 보고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면, 마음속 슬픔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활극이나, 멋진 영웅의 화려한 액션도 마찬가지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 끝에 짜릿한 역전승이나 숱한 난관을 뚫고 맺어지는 최고의 로맨스를 보태도 좋겠다. 만화는 이 모든 환상을 통해 독자를 위로한다. 만화는 칸 안으로 독자가 들어오기만 하면, 불가능이 없는 세상을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때론 만화가 현실보다 더 서글픈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독자가 칸 안으로 들어가 그 세계와 동일시되는 다른 만화와 달리 칸 안의 캐릭터가 내 옆에서 서글프게 독백하는 그런 만화가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집>, <만화가 상경기>, <여자 이야기> 같은 사이바라 리에코의 작품이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낙관과 웃음이 있는 작품이다. 거의 모든 만화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다 요시이에의 <자학의 시>도 제목처럼 서글프다. 두 작품 모두 가난과 상처를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한국에는 작가 휘이의 <숨비소리>가 있다.
흑백의 단정한 그림만 보면 팬시한 일상만화처럼 느껴진다. 일상은 맞는데, 팬시하지 않다. 사이바라 리에코의 만화에는 낙관과 웃음이 있었고, <자학의 시>에는 역설적 로맨스가 있었지만, <숨비소리>에는 깊은 가난과 상처만 있다.
서른 살 경복은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남자친구가 있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두 언니가 있지만 ‘화목한’ 가족은 없다. “아빠는 매일 술을 마시고 욕하고 때렸고, 엄마는 매일 맞고 아프고 울었다. 언니들과 난 이런 모습을 같이 보고, 같이 울었다.” 늘 아빠에게 맞던 엄마는, 1년 전 집에서 도망 나와 둘째 언니네서 4달을, 정신병원에서 3주, 둘째 이모네서 6달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셋째 딸 경복과 함께 살게 된다.
<숨비소리>는 “우리는 숨 쉬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라고 자문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경복과 엄마 수심의 이야기다. 가난과 폭력으로 상처받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이야기, 보통의 만화라면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하지만, <숨비소리>는 제목처럼 깊은 가난과 슬픔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겨우 내뱉는 숨 한 조각이다. 그 기억 기억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든다. 당연히 그 기억들은 힘들다.
중학교 3학년 때 경복이는 졸업 앨범비를 내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 변태를 만나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전화가 온다. 잘생긴, 그래서 경복도 호감을 갖고 있던 부반장 인성이의 친구라며, 인성이가 너 좋아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날 밤,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마중 나갔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는 경복에게 “여상에 가서 일찍 돈 좀 벌어라”고 말한다. 남자아이들이 “여상은 공부 못하는 날나리들 가는 곳”이라고 말을 한다. 선생은 “여상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고 말하고, 아이들 사이에 경복이 여상에 간다는 소문이 난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경복은 고민하다 피자를 먹고 만화를 본다. 졸업식날 졸업앨범에 한 마디씩 써주라고 말한 담임은 “경복이만 없구나. 경복이만 연습장에 써주라”고 말한다. 많은 가난과 슬픔이 작은 희망을 감추어 버린다. 하지만, 만화는 담담하다. 많이 서글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슬픔은 어떤 힘이 되어 내 슬픔과 마주하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경복은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한다. 말 잘 듣게 생겨 뽑았다는 회사에서 담배나 스타킹 사오는 심부름을 하지만, 첫 회식 이후 낯선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그만둔다. 회사를 그만둔 뒤 남자친구를 만나 6년을 사귄다. 편하게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이였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의지하고 남자친구와 함께 살아보려고 했던 때, 엄마가 집을 나가 여관에서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 발견된다. 그렇게 엄마와 살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오늘로 돌아온다. 남자친구가 프러포즈를 하려던 전날, 경복은 크게 화를 내고 카톡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참치깡통 뚜껑을 따다 손을 크게 베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자리에서 어디 좀 간다는 엄마의 쪽지를 발견한다. 손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른다. 경복과 수심의 삶, 더 크게 그들 가족의 삶에는 크고 작은 불행이 연속된다. 그런데 <숨비소리>는 비극을 선택하지도, 희극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해녀가 잠수했다가 숨이 턱까지 차서 물 밖으로 나와 내쉬는 그 숨소리, 숨비소리처럼 나지막하고 멀리 퍼지기만 한다.
아주 멀리 날아와 우리 옆에 도달한다. 저 깊은 바다 안에서, 오래 묵은 슬픔이 ‘휘이’하고 소리를 내며 내 슬픔에 다가온다. 그 소리는 내 슬픔과 반응해 나를 위로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를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중)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숨비소리>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준다. 마침내 슬픔은 어떤 힘이 되어 내 슬픔과 마주한다. 슬픔이 슬픔에게 말한다. 아주 담백하게 그 슬픔을 이야기한다. 우린 슬픔을 말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24110300_14009801.jpg)
그럼, 국민이 바뀌란 소리냐?
대통령 말씀에 또 답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