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이적표현물’ 군검찰 황당한 잣대

실체도 불분명한 단체의 ‘전문가’ 내세워 역사학자들의 검증된 논문에 ‘불온한 딱지’ 붙여

영화 <변호인>은 1000만 관객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후반부 재판 장면에서 공감하지 못했다는 젊은 관객도 일부 있었다. 1980년대의 시대상이 지금과 너무 동떨어진 것 아니냐는 거다. <변호인>에서 검찰은 영국의 역사학자 E.H.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등이 불온서적이라며 진우와 동료들을 기소했다. 여기서 검찰은 실체가 불분명한 치안연구소 연구원이 ‘전문가’라며 증인으로 불렀다.

김 중위 사건의 군검찰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이적표현물을 선정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전문가’를 동원했다. 김 중위는 “영화 <변호인>과 제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말은 들었다. 여동생도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다더라. 그래선지 난 그 영화를 보기가 싫었다”고 말했다.

김 중위는 한국사연구회의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를 요약한 강의노트를 자신이 가르치는 해사 생도들에게 배포했다. 군검찰은 김 중위의 강의노트가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소개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 문건이 이적표현물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전문가인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1심 법원에 제출한 소견서에서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는 근현대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 34명이 쓴 연구입문서”라며 “군검찰이 문제삼고 있는 부분은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하권에 수록된 2편의 논문을 축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김 중위의 강의노트는 한국사학계의 보편적인 연구내용을 생도들에게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검찰은 다른 ‘전문가’의 감정서를 근거로 김 중위의 강의노트가 이적표현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군검찰이 증인으로 내세운 전문가는 유광호씨였다. ‘한국전략연구소 소장’ 직함을 갖고 있는 유씨는 김 중위 사건뿐만 아니라 사노련 사건, 해방연대 사건 등 여러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감정서를 제출한 경험이 있으며, 북한민주화포럼, 자유민주연구학회 등 우파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전략연구소는 실체가 불분명한 단체다. 유씨 본인도 “한국전략연구소는 내 개인 공부방”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유씨의 전문성으로 내세운 것은 그가 서울대에서 한국사 석사과정을 수료했다는 것과 여러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감정서를 제출했다는 점이다. 반면 김 중위 측은 김 교수를 포함해 다수의 역사학·북한학 전공 교수들의 소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유씨는 김 중위의 강의노트에 대해 “3년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북한을 대한민국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보는,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시각으로 쓰여져 이적성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현직 역사 교수가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도 이적표현물이 될 수 있다. 군검찰은 김 중위가 소지한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조선인민혁명군-기억의 정치, 현실의 정치’ 2편의 논문을 문제삼으며 “저자가 김일성 및 북한 체제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논문의 저자인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자신의 논문이 이적표현물로 거론된 데 대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연구 목적으로 정식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며, 그 내용도 김일성을 찬양하기는커녕 북한 정권의 주장에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황당하다. 상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지 군검찰이 자기 잣대로 일방적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게 말이 되나.”

군법무관 출신인 강석민 변호사는 “군과 민간의 이적표현물 잣대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사회적인 잣대로 자유로운 교육을 하면 군기가 저해될 수 있다는 시각이 군 내에 있는데, 그런 게 작용한 결과 아닌가”라고 말했다.

2심인 군사고등법원은 군검찰이 이적표현물이라고 주장한 대부분의 서적·논문이 이적표현물이 아니며, 이적표현물이라 인정될 수 있는 문건 역시 “학업이나 연구를 위한 학술적 목적으로 소지한 것”으로 보아 국가보안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