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종북몰이 처음도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사제단

보수 색깔공세에 “자칫 진실 감추는 프레임에 걸려들라” 별도 대응 않고 일상활동

“이미 환하게 켜진 진실을 그릇이나 침상 밑에 둘 수는 없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났다.”(신약성서 루카복음 8장 14~15절)

11월 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 전주교구 시국미사에서 낭독된 시국선언문은 예수의 말씀으로 시작했다. 이날의 시국선언이 지난 7월에서 9월에 걸쳐 전국 천주교회 내에서 잇따라 발표된 시국선언들과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 요구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을 향한 사퇴 요구는 국가정보원에 그치지 않고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 다수의 국가기관이 개입한 여론조작 정황이 드러난 데 대한 천주교계의 첫 반응이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11월 22일 오후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논란은 의도치 않은 곳에서 터졌다. 시국미사 중 강론을 맡은 원로사제 박창신 신부의 발언 중 일부가 문제가 된 것이다. 박 신부는 이날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재물로 인한 세상의 죄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인권을 침해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세상의 죄에 관심이 없다”며 교회 밖 사회현실에 대해 신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강론을 했다. 그러나 강론 말미에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연평도 포격”이라는 일부 발언 내용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초기에 사과했으면 끝났을 일을…”
사제단은 보수진영이 불붙인 종북 논란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명하고 박 대통령의 책임있는 대처를 요구해야 하는데, 종북 이슈가 사안을 ‘물타기’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제단 대표신부인 나승구 신부는 “사실 보수언론에서 사제단에게 색깔을 뒤집어씌우고 몰아붙인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여러 번 겪어 익숙한 상황”이라며 “이 시기엔 그쪽(보수진영)에서 만든 프레임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나 신부의 말처럼 사제단은 별도의 대응을 하지 않고 기존에 진행되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제단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225일간 열던 ‘매일’ 미사가 중단된 후 다시 용산 ‘생명평화’ 미사를 재개했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사망한 노동자·가족의 분향소를 경기도 평택 쌍용차 정문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대한문 미사로 함께 진행하던 용산참사 미사를 따로 열기 시작한 것이다.

논란의 중심이 된 박 신부 역시 ‘종북 프레임’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이 원래 강조하려 한 ‘부정선거’와 ‘정권퇴진’이라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신부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불거진 종북논란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잔존하는 한 국민통합은 이룰 수 없다”며 “(박 대통령이) 초기에 책임감을 갖고 사과했다면 모두 끝났을 일인데,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나서 불법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일에 대해 국민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사제단은 종북몰이 논란을 피하는 한편 정권퇴진 움직임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지켜보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의 논란이 시국선언을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이미 지난 9월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논란이 커지고 있던 시점에서 전국 사제단 명의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사제단이 전주교구 시국미사 이후 추가로 시국선언이 필요한지를 고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 선언문에는 불법 선거개입에 대한 진상규명 및 국정원 해체, 그리고 박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방지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제단의 9월 시국선언은 사실 천주교계 내에서는 늦은 편에 속했다. 7월 25일부터 부산교구 사제들을 시작으로 전국 각 교구의 주교·사제·수도자들 2165명이 연이어 시국선언을 발표한 뒤에야 사제단도 시국선언문을 내놓았던 것이다.

전국의 사제 479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참여한 데다 평신도 역시 1만1000여명이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등 주요 종교 중 천주교의 시국선언 열기는 뜨거웠다.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대표기구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주교회의)의 한 관계자는 “이미 사제와 수도자들 사이에서 현 정권에 대한 불만여론이 높은데, 가톨릭에 종북 딱지를 붙이는 문제까지 겹치면서 주교회의 차원에서 이 안건을 다룰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제단의 시국미사가 불러일으킨 논란은 사제단의 활동에 반대하는 천주교 내 보수세력들이 결집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사제단에 대한 공격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단체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대수모)이 대표적이다.

이 모임은 천주교계 내부에서도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확산되며 각 교구별로 사제·수녀 등 성직자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르던 시기인 지난 9월 초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단체다.

9월 9일 <조선일보>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포함한 일부 좌성향 사제와 수녀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사제단의 활동을 비판하는 내용의 광고를 실은 것이 이 단체의 첫 공식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제단은 광고 게재 당시에는 시국선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계 내부에서는 이들의 의도를 의심하는 시각이 팽배했다.

대수모는 전주교구 시국미사로 논란이 불거지자 사제단이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적이 없는 임의단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교황청대사관에 파문 건의서를 전달하는 등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수모의 대표인 서석구 변호사는 개신교계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박정희바로알리기 국민모임’과 같은 친박계열 단체에도 몸을 담고 있다. 대수모 창립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인사들 가운데에는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등 친박 성향의 보수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천주교 내 친박 보수세력도 결집
천주교 내부에서는 보수성향 단체들이 사제단을 압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종교계 전체로 보면 천주교 외에도 정권 사퇴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28개 목회자·평신도 단체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한 데 이어, 개신교계의 정의구현사제단에 비견되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도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금식기도회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겠다며 나섰다.

여기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이어졌다. 장신대는 개신교 내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교단 신학교라는 위상 때문에 타 교단 신학생들과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시국선언이 확산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불교계 역시 조계종 소속 승려 1012명이 시국선언에 참여하면서 대열에 동참했다. 불교계 내 진보적 성향의 승가단체인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이 시국선언문에서 “정부와 여당이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신들과 다른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 ‘종북세력’이란 낙인을 찍으며 이념투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 사태를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린 심각한 헌정질서 파괴로 규정한다”며 정부와 여당이 이념갈등 조장을 멈추고 대선개입 특검을 수용하라는 등의 요구를 밝혔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태 계기로 결성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74년 9월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사태를 계기로 결성됐다. 지 주교는 유신헌법 무효를 주장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1972년의 유신체제가 발족한 뒤 그 이듬해인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지는 등 반독재·민주화 세력을 향한 공안통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사제단은 ‘제1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1975년까지 세 차례의 시국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등에도 동참하는 등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종교계의 대표적인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 사제단은 유신헌법 반대, 긴급조치 무효, 헌정 회복 등을 내세웠고 1976년에는 명동성당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함석헌 신부 등을 주축으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박 전 대통령에 이어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사제단은 사회적 현안의 전면에 나서 왔다. 1980년 5월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을 발표한 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이번 시국미사의 박창신 신부는 괴한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사제단은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해 6월 민주항쟁에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했다.

정권교체 등 한국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행된 뒤에도 2007년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사건을 폭로하는 등의 역할을 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시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현장에서도 시국미사를 주재하는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 실정을 지적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4대강 사업 저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 그리고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등은 사제단이 현재까지 참여하고 있는 활동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