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비포 선 셋 - 사랑해도 망설이는 ‘현상유지 편향’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꿈같은 하루를 보냈던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6개월 뒤에 만나자며 헤어졌지만 이들이 다시 만나는 데는 9년이 걸린다. 그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비포 선 셋>(2004)이다.

전작 <비포 선 라이즈>가 하룻밤의 이야기였다면 <비포 선 셋>은 85분의 이야기다. 제시가 파리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잠시 난 짬이 전부다. 제시는 셀린느와의 만남을 책으로 펴낸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프랑스 파리에서 저자 사인회를 연다. 한 귀퉁이에서 제시를 바라보는 낯익은 눈빛이 있다. 셀린느다. 두 사람은 센 강변을 따라 걷는다.

차도 타고, 유람선도 타면서 그동안 아껴뒀던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30대가 된 두 사람은 각기 길을 걷고 있다. 셀린느는 환경운동가가 됐고, 애인은 종군기자다. 제시는 학교 선생과 결혼을 해 아이까지 둔 유부남이다. 두 사람은 달라진 처지를 깨달으며 다가갈 듯하면서도 다가설 수 없다. 9년 전에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공간적인 제약이, 지금은 각기 다른 인생이 발목을 잡는 셈이다.

제시가 “대체 왜 빈에는 안 온 거야. 그럼 모든 게 변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셀린느가 답한다. “그때 안 만난 게 다행일지 몰라. 잠깐씩 만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제시는 “그때 왜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을까”라고 안타까워한다. 셀린느가 말한다. “젊고 어리석었으니까. 세상에는 생각보다 제약이 많아.”

제시는 지금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셀린느는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 지금이라도 서로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셀린느가 제시에게 기타로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끝난다.

두 사람이 또 망설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현상유지 편향’이라는 심리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은 특별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 한 현재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상황을 바꾸면 좋을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현재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현상유지 편향은 행동경제학을 통해 경제학에 접목되고 있다. 휴대폰 서비스에 가입할 때 석 달만 쓰고 끊어도 된다는 얘기에 솔깃해 부가서비스를 이용한 게 2~3년간 죽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한 달에 몇 백원밖에 되지 않는 부가서비스라면 굳이 통신사에 전화해 서비스를 끊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집에 가서 항상 먹던 짜장면을 짬뽕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다. 혹시 짬뽕을 시켰다가 맛이 없는 ‘리스크’를 감내하기 싫기 때문이다.

윌리엄 새뮤얼슨 교수의 실험을 보면 현금으로 상속받았을 때와 주식 혹은 채권으로 상속받았을 때 피상속인의 행동이 달라진다. 현금으로 받으면 투자를 하거나 예금을 하는 등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지만, 주식과 채권으로 받으면 그냥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상유지 편향을 이용한 마케팅이 ‘디폴트 옵션’이다. 처음부터 옵션이 선택된 걸로 해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을 할 때 ‘개인정보 공개에 동의하십니까’라는 목록이 미리 체크가 된 경우가 간혹 있다. 통상 이럴 때 동의율이 높다. 가입자들이 별도로 클릭을 해 해제하는 것이 귀찮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운전면허 신청을 할 때 장기기증 의사를 묻는다. 기본 선택에 ‘기증의사가 있다’가 표기돼 있으면 장기기증률이 높고, 표기가 돼 있지 않으면 낮다.

영화 속 경제

제시는 “평생 배우자랑 남남처럼 살다가 인생 다 가버리면 너무나 비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합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냥 지금의 삶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몇 분 뒤 제시는 미국으로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두 사람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