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한국현대사학회의 ‘유신체제 평가’ 논란

한국현대사학회는 2011년 5월 20일 창립했다. 회장은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다. 권 교수가 대표 집필자로 참여하고 교학사가 발행하는 고교 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 검정 본심사를 통과했다. 8월 30일 최종 합격 판정을 받는다면 이 교과서는 내년 3월부터 사용된다. 교과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집필자나 출판사가 최종 합격 판정 이전에 교과서 내용을 공개하면 합격이 취소된다. 권 교수는 6월 3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정말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검정이 모두 끝난 뒤 실제 기술 내용을 가지고 공개 토론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교과서 내용에 대해 모르면서 악의적 선동을 하는 것은 학문적 태도도 아니고, 바람직한 토론문화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새 교과서가 ‘뉴라이트 교과서’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 근거 없는 ‘억측’일 뿐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 학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 자료 중 하나는 학회지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지난 1월 31일 학회지 <한국현대사연구>(북코리아) 창간호(제1권 제1호)를 발간했다. “학문적 연구활동의 성과에 기반을 두어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에 기여하고, 최근 표류하고 있는 우리나라 근현대사교육을 바로잡고 학교교육과 시민교육 등 한국의 근현대 역사교육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지표를 제시하는 데에 구심점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게 발간 취지다. 외국인 필자 2명의 글을 포함해 6편의 논문이 실렸다. 주목할 것은 한국인 필자들이 쓴 논문 4편이다.

김세중 교수(연세대)는 ‘유신 다중 국가론’에서 유신체제의 성격을 분석했다. 그가 말하는 다중성이란 1972년 10월 성립된 유신체제가 “‘폭력국가’의 특징과 함께 ‘발전국가’와 ‘안보국가’의 특징도 지니고 있음을 지칭한다.” 김 교수는 유신이 헌법적 정당성을 결여한 초헌법적 폭력통치 구조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보국가’와 ‘발전국가’의 특징을 동시에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기존 유신시대에 대한 연구와 회고물들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균형 있게 유신시대의 전체상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유신이 단순히 폭력적 체제였을 뿐이라고 보거나 반대로 유신이 국가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한 노력이었다고만 파악하는 것은 전체의 일부만 보는 배타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폭력국가’ 특징과 함께 ‘발전국가’ 강조
김 교수는 10월 유신의 원인으로 우선 박정희의 권력의지를 지목한다. “헌정질서 파괴를 통해 또 다시 집권 연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폭력국가의 작동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종신 집권을 향한 박정희의 권력욕이 유신의 뿌리라는 진보사학계의 평가와 일치하는 지점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유신체제 성립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다른 요인들이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박정희에게는” “적어도 박정희의 인식에서는” 등의 단서 조항을 달고, “안보위기 극복의지” “근대화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로서의 발전의지” “‘생산적 정치’에 대한 그(박정희)의 평소의 열망” 등을 유신체제 성립의 또 다른 요인으로 지목한다.

‘안보위기’의 배경은 1971년 미 7사단 병력의 철군과 비슷한 시기의 미·중간 화해 움직임이다. ‘발전의지’의 배경은 1960년대의 경공업 위주 발전전략이 한계에 직면한 결과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생산적 정치에 대한 열망’의 배경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가 보여준 선전이 박정희에게 안긴 충격이다. 대선 결과는 “그(박정희)가 힘들게 구축해온 발전과 안보 국가체제가 적어도 그의 인식에서는 야당 정치인의 대중영합적 바람몰이로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었고”, 이것은 “유신체제의 도입에는 적어도 박정희의 인식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생산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도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진보사학계의 해석은 다르다. 대표적인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사학)는 이렇게 말한다. “10·17 쿠데타는 박정희 자신의 강렬한 권력욕 외에는 하등 정당화시킬 만한 이유가 없었다. 사회적·경제적 위기도 없었고, 남북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미·중국간의 화해도 박 정권을 위기에 빠뜨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위기극복 체제라고 보기에는 종신 집권의 의도가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1인체제였다.(<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2013)

“민주주의 후퇴 불구, 사회 대전환 시기”
유신체제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김 교수는 “유신은 역사 발전에 커다란 퇴보를 기록한 시기”라고 규정하면서도 “유신 시기는 동시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추진으로 한국 사회를 동태적 산업사회로 변화시키고 자주국방 토대 마련을 위한 획기적 계기로 작용한 시기였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그가 보기에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의 확립’ ‘국가안보’ ‘경제발전’ 등 “건국 이후 제기된 국가 과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화학공업화의 결과 한국은 명실상부한 공업국가로 변모”했고 유신 시기 산업화는 “건국 이후 열망사항이었던 국민의 후생 향상을 가능하게 하였음은 물론 안보체제를 공고화하고 민주주의 실천에 불가결한 사회경제적 하부구조를 놓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표면적 후퇴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또는 심층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근대사회로의 명실상부한 대전환을 준비한 시기”라는 게 김 교수의 결론이다. 이러한 논법은 ‘5·16’이 ‘쿠데타’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세력이 국가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한 일대 변혁”이자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2008)의 역사인식을 연상케 한다. 김세중 교수는 뉴라이트 성향 교과서포럼이 펴낸 <대안 교과서> 집필자 12명 중 한 명이다.

학회장인 권희영 교수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이념의 성장’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학자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면서 그들이 “오로지 인민민주주의의 맹아만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임이사인 김용직 교수(성신여대)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을 분석했다. 두 논문 모두 2011년 고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유민주주의 논쟁’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상임이사인 이명희 교수(공주대)는 학교 현장에서의 현대사교육 문제를 다룬 논문(‘교육과정 실행의 관점으로 바라본 한국 현대사 교육의 역사’)에서 역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에 대한 논란 이전에 학교 현장에서 현대사 교육이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면서 “왜 한국 현대사를 가르치고, 또 어떠한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며,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 등의 물음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고,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논문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기본 방향을 추정할 수는 있다. 학회장 권희영 교수는 지난 5월 31일 현대사학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적어도 북한에 대해서는 확실한 체제 우월성이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중심에 놓고 긍정적 정체성을 키워줘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서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교과서는 우리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하게 태어난 나라인지, 그 나라가 지난 60년간의 건국사에서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 <대안 교과서> 필자들의 인식과 비슷하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