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어긋난 국가주의 고취하게 될까 겁난다”

“우리나라 교육이 아직도 주입식 풍토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정치적 입장에 맞춰 쓰인 교과서까지 등장하면 역사교육이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사 과목은 성인들의 기억에도, 현재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생각으로도 전형적인 ‘암기 과목’이다. 고인돌이 많이 분포하는 지역부터 조선 후기 외국 열강들의 개입까지, 수천년의 역사에 대한 기억은 시험에 나오니까 외워야 할 것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경기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사인 신민호씨(가명·42)는 이른바 ‘뉴라이트 한국사 교과서’가 교육현장에 도입되면 암기 위주 수업방식의 문제와 얽혀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서울의 한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교사의 수업을 듣고 있다.(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김영민 기자

뉴라이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한국사 교과서가 교과서 검정을 통과하면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 한국사 교육을 맡고 있는 현직 교사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교육을 비롯해 학교 공교육이 피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 교과서 논란은 기존의 문제를 더 해결하기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씨는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학생시절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학생시절뿐 아니라 성인 이후에도 영향력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에서 단군조선은 거의 다루지 않지만 일반대중들도 단군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단군조선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를 떠나서 어떤 역사관이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으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게 박힌다는 걸 보여주는 예다.” 신씨는 사료가 많은 근·현대사의 역사 인식은 논란의 여지도 크지만 한쪽의 역사인식이 주도권을 잡으면 그만큼 파급력도 커진다면서 “일제 강점기에 유포된 조선인의 당파성론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면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 교과서로 공인돼 학생들에게 교육될 경우 후대에 미칠 영향은 클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차원에서 뉴라이트 교과서의 위험을 경고하는 시각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독재시기를 반공과 경제성장의 면모만 부각시켜 현 기득권층의 시각을 보다 노골적으로 주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 최미현씨(가명·34)는 “교과서 집필 준거안이 있는데 뉴라이트 교과서라 해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내용이 들어가진 않을 것 같다”면서 “오히려 지난 정권들의 치적을 보다 교묘하게 포장하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산세력에 맞서 남한 정부를 세우고 유지했다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엔 온 국민이 단결해 수출을 늘리고 낙후된 경제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말이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다양한 역사적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사실 가운데 한쪽 면만 조명하는 교과서가 나오는 것을 경계했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를 ‘젠틀맨’으로 알고 있다는 방송도 나왔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수업에는 집중하지 않아도 역사 자체에 그렇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일베 같은 우익 사이트나 다른 진보 사이트를 통해 현대사에 대해 들은 학생들이 질문하는 경우도 많고, 또 그 질문에 대해 설명해주면 수업과 무관한 내용인데도 귀 기울여 듣는 학생들도 많다.” 그에 따르면 현행 역사교육의 문제는 딱딱한 내용의 교과서에만 맞춰 교사가 일방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기를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교육은 단순한 사건을 열거하는 게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찾도록 해줘야 하는데, 현행 교과과정에선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뉴라이트라고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닌 건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틀린 부분을 찾아내고 왜 틀렸는지 토론할 수 없는 분위기라 학생들이 역사에 흥미를 잃고 그저 교과서 내용을 시험용으로 외우기 바쁜 데 있다.”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 길러줘야”
대구의 고등학교 교사 하승식씨(가명·46)도 교사와 학생들의 관심이 서로 동떨어져 있는 수업시간의 교실 분위기를 언급했다. 하씨는 “뉴라이트 교과서가 문제가 많더라도 차라리 논란이 되는 부분 때문에 학생들이 더 역사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면서 “작년까지 한 학기 안에 한국사나 동아시아사 교과를 끝내버리는 집중이수제를 할 때는 몇천년의 역사를 다루는 교과진도가 한 학기만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학생이건 선생이건 정신 없이 쫓아가기 바빴다”고 말했다.

하씨 역시 일각에서 주장하는 근·현대사 관련 주장이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게 될 것을 염려했다. 그는 “얼마 전 5·18이 폭동 아니냐며 묻는 학생이 있어 설명해준 일이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 세대보다 더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데에 놀랐다”며 “일제 강점기 단원을 수업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십중팔구 ‘일본놈들은 개XX라 쳐들어가서 짓밟아줘야 된다’란 답이 나온다. 현행 교과서로써도 군국주의와 침략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르치는 효과는 없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뉴라이트 교과서를 학교마다 채택한다면 어긋난 국가주의만 고취하게 될까 겁난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입시 위주, 사교육이 주가 된 교육환경 때문에 학생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역사인식이 더욱 단편적인 이해에만 머물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교육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고선 일방적인 입장에서 집필된 교과서가 끼칠 폐해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과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교육체제 전체와 얽힌 문제여서 쉽게 해결하긴 어려울 것이란 회의적인 관측도 뒤따랐다.

교사 신민호씨는 “단지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한다거나 학교 수업시수를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에 여전히 관심 없고 학원에서 한국사 과목만 늘어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뾰족한 대안은 없지만 교과서 문제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시점에 언론이 역사교육의 근본적 문제도 함께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향후 장기적으로 미칠 파장을 생각해 학교 현장의 역사교육 문제를 공론화할 것을 요구했다.

교과서 문제만 놓고 봤을 때 교과과정 편성과 집필 준거안을 보다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교사 최미현씨는 “국정 교과서에서 검정 교과서로 바뀌면서 이전보다 색다른 기술방식이 일부 들어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엔 부족하다”면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반대편의 수탈론 등 다양한 입장을 함께 제시하고 학생이 스스로 참여해 학습할 수 있게 하는 교과서가 나오면 한쪽의 정치적 입장에 치우친 교과서는 자연히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