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9·11테러 10년]9·11에 대한 대응도 역시 폭력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이 9·11 희생자보다 더 많은 민간인 죽여

시몬 천 교수

시몬 천 교수는 대구 출신으로 샌타 바버라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보스턴 서폭(Suffolk)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이자 서폭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회원으로, 한진중공업 사태, 제주도 강정마을 문제 등을 연구중이다. 지난 7월 8일에는 “대한민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당신들의 용기있고 명예로운 행동,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위한 전반적인 노력에 지지의 뜻을 표하고 싶다”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메시지를 한국 언론에 전한 바 있다. <편집자 주>

“가서 폭파하고 모두 죽여 버리자.”
2001년 가을학기 필자의 ‘국제분쟁의 해결’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아프간 전쟁이 개시될 무렵에는 세계의 지성이자 양심인 노엄 촘스키 교수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렸다. 끔찍하고 호전적인 말들이 강의실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2001년의 가을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은 피의 날이었고, 21세기는 피의 세기다. 10년이 흘렀다. 수천억 달러가 소모된 이라크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됐고 빈 라덴도 사살됐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8월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66명이 죽었다. 이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9·11 공격은 분명한 폭력이었고, 9·11 이후의 대응 역시 폭력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비극인 9·11은 미국인들에겐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전쟁이란 오직 외국에서만 발생하는 일이었다. 2차 대전 말기의 진주만 폭격도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다. 소련과의 냉전시기에도 미국 본토가 직접적인 전쟁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미국 본토는 항상 전쟁에서 비켜서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전쟁이란 할리우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총부리는 항상 타국민들에게만 겨누어져 왔다. 9·11은 이런 역사의 종식이자, 미국인들에게 직접 총부리가 겨눠진 첫 사례였다.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전쟁
9·11로 촉발된 ‘테러와의 전쟁’은 절대적인 선과 악을 전제로 한 전쟁이다.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전쟁이다. 테러와의 전쟁의 구실이 된 갈등과 분쟁은 사실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 역시 국가 안보,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 선악의 대결, 민주주의의 확산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에 불과하다. 사실을 들춰보면 거짓에 불과한 추상적인 단어들은 미국인들을 냉전시대의 악몽으로 몰아넣었다.

베트남 전쟁 때부터 신부의 옷을 벗고 평생을 반전운동에 바친 작가 제임스 캐롤은 ‘그라운드 제로’라는 명칭이 미국인들에게 갖는 함의를 설명했다. “9·11의 비극이 TV를 타고 흘러나오면서 미국인들은 냉전시대 핵 공포의 악몽으로 다시 빠졌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진 장소는 핵무기가 투하된 피폭 중심지를 뜻하는 군사용어인 ‘그라운드 제로’로 명명됐다.”

부시 전 대통령은 대테러를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일방적인 안보정책을 폈다. 또한 중동,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에 미군기지를 더 건설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테러 위협은 줄어들기는 커녕 최고 수준으로 늘어났다. 테러와의 전쟁은 3000여명에 가까운 9·11 테러 희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민간인 희생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이슬람권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차별도 더욱 강화됐다. 미국인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의 미국인 무슬림들이 차별대우를 경험했으며, 57%는 친구와 가족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답했다. 반면 보통의 미국인들 중 22%가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지지했고, 27%는 무슬림이 등록되어 경찰에 의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미국인 4명 중 한 명이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인들은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로 인한 터무니없는 우월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절대선을 독점한 일부 미국인들은 패자가 승자의 꿈에 종속되길 요구한다.

제임스 캐롤은 타인에 대한 야수적 공격성의 기저에 9·11 이후 일깨워진 미국인들의 공포심이 있다고 지적한다. “9·11 테러는 미국인들의 심리에 잠재하고 있던 야수적 반응을 일깨웠다. 10년이 지나도록 9·11 테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불의(不義)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미국인 스스로의 시민적 권리가 침해받고 있으며,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도 다시 나타났다.”

미국 내 무슬림 차별 더욱 강화
하지만 진정한 테러는 약한 자들이 아닌 강한 자들의 테러였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구실 아래 미국과 나토, 심지어는 유엔의 비호 아래 주권 국가들이 하나둘씩 침공을 받았다. 오마바 대통령이 들어선 뒤에도 미국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국가는 가장 강력한 조직적 폭력집단”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근대국가는 형성 과정에서부터 전쟁과 떨어질 수 없었으며 이는 나치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말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는 거대한 군사국가의 등장과 폭력으로 무장한 국가로 인해 시민사회의 영역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치 체제가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다. 나치즘은 물러났지만, 21세기의 시민사회는 이전 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국가와 석유-군산복합체의 연합과 맞서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 / 위키백과

미국의 석유-군산복합체라는 괴물은 10년 동안 2배 이상 성장했다. 반전운동가 제임스 캐롤은 연 7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 국방부의 예산과 연방정부의 재량예산의 약 절반가량이 ‘불필요한 전쟁’에 소모된다고 지적했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군비를 전부 합한 것과 거의 같은 미국의 군비 지출액은 석유-군산복합체의 유지비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연 490억 달러에 달하는 국무부 예산, 430억 달러가 넘는 국토안보부 예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쓴다. 이 많은 돈은 냉전시절 소련의 자리를 대신한 중동의 소위 ‘테러리스트’들과의 대결에 쓰이고 있다. 9·11 이후 시작된 전쟁은 석유-군산복합체를 위해 영원한 전쟁이 되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진보적 정치경제학자 패트릭 본드 교수는 9·11 테러와 조지 부시 정권은 끝이 났지만, 새로운 원유와 시장을 찾아 미국의 군사적 팽창을 요구하는 ‘9·11 체제’는 온전히 남아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본드 교수는 “9·11 테러 이후 신보수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 우파의 화신 조지 부시는 석유-군산복합체에 사회의 헤게모니를 넘겨줬다”며, “오바마의 집권은 새로운 체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이 오바마를 선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 대통령 개인에게만 집중하면 자본이 미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정확히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전쟁에 낭비한 미국 재정 위기
불필요한 전쟁에 수많은 돈을 낭비한 결과 미국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미국의 대외부채를 폭증시켰다. 9·11 이후 10년간 대외부채는 350% 이상 많아졌다. 미국인 1인당 4만6000 달러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부채의 대부분은 부시 전 대통령 재임기간에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 역시 부시와 경쟁이라도 하듯 국가부채를 증가시켰고, 결국 국가채무한도액을 넘어서는 데 이르렀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중인 미군 1명을 유지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연간 100만 달러에 달한다. 이런 나라에서 7명 중 1명이 빈곤선 아래서 허덕인다. 필자의 제자들 중에도 이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다니고, 강의 시간에 졸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다.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는 이들을 기다리는 곳은 미군 혹은 안보와 국토 방위 등 죄다 ‘테러와의 전쟁’에 관련된 곳들뿐이다. 미국은 젊은이들이 꿈 대신 전쟁을 선택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걸고 도박하는 꼴이다.

본드 교수는 9·11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사회의 반성 움직임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진보적 대중운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애매모호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목아래 각국의 진보운동세력이 탄압을 받았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미국의 테러리스트 블랙리스트에서 삭제된 것은 겨우 2008년의 일일 정도로 테러리스트 규정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말했다. “9·11 10년은 신자유주의, 환경 파괴, 군사주의 문제에 대한 의식을 깨울 이슈라고 생각한다”는 본드 교수는 “국제적 노동자 계급을 바탕으로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벌어진 반WTO 운동처럼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국제적 투쟁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의 처형>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양민들을 총살하는 현장을 붓과 캔버스로 절규하듯 그렸다. 전쟁의 절망은 한 예술가의 시각을 통해 다시는 이런 불의를 용납하지 말자는 희망으로 승화된다. 진정으로 양심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어제의 불의에서 초래된 폭력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다. 야만적 폭력의 희생양이 된 수많은 영혼들의 절망에 대한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폭력의 현실을 직시한다.

비극과 희극을 꼭 번갈아 썼던 셰익스피어처럼 이제 인류는 희극을 쓸 준비를 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실수의 연발>에서 헤어졌던 쌍둥이 형제가 마침내 해후하며 이렇게 결심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가지도, 뒤처지지도 말고, 손 꼭잡고 함께 가자.”

시몬 천<미국 서폭대 정치학과 교수> simonech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