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책과 음악과 우정이 만나는 문화공간’

책방이음·길담서원, 사회과학서점의 ‘대안’ 모색

그곳에는 더 이상 휴대폰은 물론 호출기도 없던 시절의 청년들을 정확하게 약속 장소로 불러 모으던 손바닥만한 종이 메모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던 민중가요도, 조악한 디자인이나마 꿈틀거리는 변혁의 기운을 담고 있던 ‘세미나 교재’도 없다. 사회과학서점의 쇠퇴에 대해 말하는 건 오래 전에 새삼스러운 일이 됐다. 대학가에서 사회과학서점의 씨가 거의 말라버린 건 이미 10여년 저쪽의 일이다.

길담서원

간신히 살아 남은 서점들은 풍경이 변화했는데도 고집스레 제 모습을 유지하며 책문화를 힘겹게 지켜나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생겨난 서점들은 확 달라진 풍경에 맞추어 새로운 책 문화를 만들려 한다. 그 새로움의 키워드는 ‘문화’다. 서울에서라면 종로구 혜화동 ‘책방이음’과 통인동 ‘길담서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대학로 혜화역 부근에 있는 책방이음은 2005년 ‘이음아트’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나중에는 ‘이음책방’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는 뜻으로 이음이라 지었다. 이음책방은 책만 있는 곳이 아니라 갤러리와 카페도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문화공간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독자들과 예술가들과 애호가들이 모인 그곳에선 사진전과 연극공연과 노래공연이 함께 어우러졌다. 문제는 문화는 넘쳐났지만 돈은 돌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점은 기울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서점을 살릴 대안을 논의하기 위한 공청회와 후원의 밤도 열렸다.

평화운동단체인 ‘나와 우리’ 상임활동가인 조진석씨는 이 과정을 오래 지켜봤다. 그는 “공청회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워낙 부채가 많아 대안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이음책방이 문을 닫는 건 자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지난 10월 6일 오전 11시, 조씨는 45평 규모 매장에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종일 서점에 울릴 배경음악을 틀고, 행주로 카페 테이블을 닦았다. 폐업 위기를 맞았던 서점의 운영권은 지난해 12월 24일자로 나와 우리에 넘어갔다. 나와 우리는 대학로 사무실의 전세금을 빼 서점에 투자했다. 서점 이름은 앞뒤 순서만 바꿔 ‘책방이음’으로 했다. 나와 우리가 운영권을 가져간 후 조씨는 이음에서 상근으로 일하고 있다. 아르바이트생 2명과 자원봉사자 5명이 번갈아 그를 돕는다.

바퀴 달린 서가, 공연장으로 변신
판매하는 책의 성격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서점 한쪽 벽 전체가 사진책이었지만, 지금은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주류다. 대신 책과 갤러리와 카페가 뒤섞인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갤러리에서는 한·중·일 평화그림책 <비무장 지대에 봄이 오면>의 작가 이억배씨의 일러스트를 전시하고 있다. 서가 한편의 테이블에서는 커피와 수제 쿠키를 주문할 수 있다. 서점 한복판의 바퀴 달린 서가를 이동시키고 거기에 갤러리 공간을 합하면 얼추 15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연극과 낭독회가 있을 때는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책방이음

올해로 문을 연 지 2년이 되는 통인동 ‘길담서원’은 ‘책과 음악과 우정이 만나는 문화공간’을 표방한다. 기본적인 공간 콘셉트는 이음과 같다. 20여평 규모의 매장에 서가와 카페, ‘한뼘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작은 갤러리 공간을 갖추고 있다. 이음처럼 중앙 서가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성인 50여명이 들어가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성격은 조금 다르다. 이음이 ‘서점’을 중심축으로 문화공간을 결합했다면, 길담서원은 ‘문화공간’을 중심축으로 서점의 기능을 결합했다. 길담서원 대표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는 “70대를 한해 남겨놓고 있던 2008년, 더 이상 오랜 꿈을 미룰 수 없어 길담서원을 열었다”면서 “길담서원은 기본적으로 문화공간이다. 서점은 그러한 문화공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길담서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활발한 공부모임이다. 고전 읽기, 영어책 읽기, 청소년 인문학, 어른을 위한 인문학, 중국어 고전 등 주제도 다양하다. 공부할 주제와 책은 회원들이 정한다. 박성준 교수는 회원들이 결정한 일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공부모임은 그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활동 중 하나다.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와 세상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길담서원의 지향점에 부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전읽기 등 활발한 공부모임
박 교수는 80~90년대 사회과학 서점이 쇠퇴한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은 작은 책방이 설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도 변했다. 사회과학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가 갔다. 기존 사회과학서점은 이러한 변화에 창조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됐다.” 이음의 조진석씨는 비슷한 맥락을 조금 다른 언어로 표현했다. “독자들과의 유대가 크게 약화됐다. 대학문화를 대중문화가 지배하게 되면서 사회과학 서적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었다.”

공간을 활용하는 강조점은 달라도 길담서원과 이음의 교집합이 책을 파는 ‘서점’이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기존 사회과학서점과는 달리 ‘문화공간’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두 책방의 서점으로서의 자생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유물론에 기반한 사회과학 책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 책들이 자리잡고 있다. 좋은 책의 기준을 충족한다는 전제 아래 딱딱한 책만이 아니라 대중적인 인문서까지 고루 갖춰놓았다. 그러나 책만 팔아서 서점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길담서원의 서원지기 이재성씨는 “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지만 정작 책을 사는 이들은 많지 않다”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책 판매가 아니라 강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진석씨는 “여기는 대학로라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어서 그래도 꽤 팔리는 편”이라면서도 “책 판매를 통해 이익은 내고 있지만 그 이익이란 게 정규직 직원을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안 된다. 부산의 인디고서원도 지역 금융기관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뾰족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소비자들이 책을 소비하는 행태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이재성씨는 “얼마전 서점에 들른 한 손님은 책을 두 권 고르고 나서 무겁다는 이유로 그냥 두고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음은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고 구매금액의 일정 부분을 마일리지 형태로 적립해준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의 할인혜택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조진석씨는 “독자들과의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해서 독자들과의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서 인문사회과학서점이라고 할 만한 곳은 채 10곳도 안 된다. 이음이나 길담서원처럼 서점과 문화를 접목한 새로운 모델을 시도하는 곳은 더 오랜 시간의 검증을 거쳐야만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도 책방 주인의 안목이 골라놓은 좋은 책들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글·사진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