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사회과학출판사의 변신은 무죄

1990년대 들어 이념서 퇴조하자 청소년도서 출판으로 활로 모색

한국출판 역사에서 1980년대는 인문사회과학 시대로 일컬어진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해직교수나 교사, 해직기자, 운동권 학생들이 거대한 세력을 이루며 출판계에 유입되어 지배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 하에서 은유와 풍자의 문학서적과 잡지 등으로 저항하던 세력들이 1980년대에는 선진적 이론을 담은 인문사회과학서적으로 폭을 확장하며 출판시장에서 확실한 한 세력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이념서적이 퇴조하면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던 출판사도 다른 분야로 영역을 옮겨가며 생존을 모색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서점 인문 역사 코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경향신문

마르크시즘 서적의 활발한 출간과 사회구성체 논쟁의 확산은 우리 사회의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이 무엇인가를 확연하게 깨우쳐주었으며, 한국 근현대사를 천착한 책들은 대중의 진보적인 세계관 정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등을 비롯한 대하소설은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촉발한 ‘역사교과서’였다. 북한 원전의 출간은 우리 사회의 통일 의지를 북돋워주었다.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미완성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가져온 것은 출판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출판인들이 구속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수많은 책들이 불온서적이라는 미명하에 압수되거나 판매금지당하는 수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출판문화운동사>에 따르면 5·6공화국 시절에 구속된 출판인이 110명, 판금·압수된 서적이 1300여 종 약 300만 권에 이른다.

그러나 수난만 당한 것은 아니다. 억압된 세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독자의 열망에 힘입어 분단시대의 역사를 다룬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이나 사회변혁에 대한 철학적 논리화를 시도한 <철학에세이>(조성오) 같은 책이 100만부나 팔려 출판사들이 안정된 경영을 이루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장길산> <태백산맥> <임꺽정> 같은 대하소설은 출판사에 대들보 하나는 확실하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대중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급격하게 관심을 좁혀갔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이념 지향의 책들은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빈자리에는 경제서와 과학서, 실용서 등이 대신 채워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읽었던 30~40대가 경제서와 기업 경영서, 미래 정보사회 진단서, 환경론, 실용서 등으로 관심을 옮겨가는 시대에 인문사회과학서적을 펴내던 출판사들은 주로 아동, 청소년 분야로 영역을 옮겨가면서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동출판계에 새로운 변화 주도
창작과비평사(현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문학동네, 실천문학사 등 주요 문학출판사들은 일제히 아동출판으로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한길사, 사계절, 동녘, 돌베개, 풀빛, 논장, 두레, 청년사, 미래사, 한울림, 온누리 등 주요한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아동, 청소년 출판으로 변신을 꾀했다. 이들은 보리, 보림, 재미마주, 길벗어린이, 다림, 우리교육, 산하 등 새로 등장한 아동전문 출판사들과 함께 경박단소한 책들과 전집이 판을 치던 아동출판을 확실하게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일하는 자의 철학>과 <임꺽정> 등을 펴낸 괘씸죄로 발행인이 두 차례 구속되기도 했던 사계절은 1994년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을 도입하기로 확정하면서 1992년 12월에 펴낸 <반갑다 논리야> 시리즈가 논술대비용 서적으로 주목을 받아 30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후 확실하게 변신한 대표적 경우다. <남북어린이가 함께 읽는 전래동화>(전10권)와 <남북어린이가 함께 읽는 창작동화>(전5권)로 아동출판을 시작한 사계절은 이후 <역사신문> <세계사신문> <한국생활사박물관> 등의 대형 기획과 1997년 시작된 ‘1318문고’등으로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교양서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책에 1980년대에 책으로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의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원래 유통이 생산을 규정하는 법이다. 아무리 뜻이 좋은 책이라도 판로가 없으면 ‘물건’이 생산될 수 없다. 1980년대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없었다면 인문사회과학 출판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서점 경영자 중 나중에 이해찬, 김문수, 김부겸, 조승수, 선병렬 등 국회위원이 된 사람도 여럿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선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은 분명한 자기입장을 갖고 있었다. 가령 연대 앞의 ‘오늘의책’이 NL(민족해방)이라면 ‘ 서림’은 PD(민중민주) 계열이었다.

전국의 주요 대학 앞에는 어김없이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서울의 경우에만 한정해 보더라도 건국대의 인, 경희대의 지평, 고려대의 장백·황토, 동국대의 녹두, 서강대의 서강인, 서울대의 광장·그날이오면·열린글방·백두책방·전야·아침이슬, 성균관대 앞의 풀무질·논장, 서울시립대의 창의, 연대의 오늘의책·알·밥, 중앙대의 청맥, 이대의 다락방, 외대의 죽림글방, 한양대의 한마당, 홍익대의 이어도 등은 스스로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어 판매하며 세상 변혁을 꾀했다. 이들이 구속을 불사하며 의식화 서적을 팔아 판매금지된 책이 오히려 안정적 판매가 이뤄지는 바람에 ‘좌파상업주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1990년대에는 한때 전국적으로 100여개로 늘어난 어린이 전문서점이 있었다. 어린이 전문서점을 출입한 사람들은 1980년대에 책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는 것을 주도했거나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이라면‘의식화’의 세례를 직접 받은 사람이 아닐지라도‘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고 혁명에도 눈뜨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들이 어린이 전문서점에서 자식과 함께 읽을 책을 열렬히 찾았기에 출판사들이 변신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동, 청소년 책은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온라인서점 과다할인 출판문화 질식
2000년대 초에 등장해 수많은 오프라인서점을 퇴장시킨 온라인서점들은 과다 할인을 일삼고 있다. 최근에는 아동, 청소년 책의 스테디셀러마저 반값 할인판매하고 있다. 그 바람에 의미 있는 책이 아니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유통의 원칙을 고집하는 출판사들은 시장에서 확실하게 소외되기 시작했다. 양서로 세상을 변하게 만들려던 출판사들이 모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은 불문가지다.

결국 출판문화는 질식해가고 있다. 새로운 유통혁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런 위기는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레드북스’의 등장은 태평양에 조약돌 하나를 던지는 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시절 책으로 사회변혁을 꾀한 출판사들이 뜻있는 서점들과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실제로 바꿨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