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4월 혁명으로 가는 길, 1950년대 시민사회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더 커져

<Weekly 경향>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주제로 2010년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광복과 분단, 전쟁과 대한민국의 성립에서 1950년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김호기 교수가 1공화국 정치인들의 동상이 서 있는 국회의사당을 방문해 1950년대 한국사회를 돌아봤다. <편집자주>

국회 의사당 로비에 마련된 해공 신익희(왼쪽)와 우남 이승만의 동상. 이들 정치인은 광복과 대한민국의 초기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올해를 기념하는 행사 가운데 나의 전공과 연관해 가장 뜻깊은 것은 1960년 4월 혁명 50주년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이 봄에는 4월 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어떤 사회운동이라 해도 그것이 단숨에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의 전사(前史)가 있고, 진행 과정이 있으며, 장구한 영향이 있게 마련이다. 4월 혁명도 마찬가지다. 정치사적 시간에서 4월 혁명은 1960년 3월과 4월에 일어났지만 사회사적 시간에서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에서 1960년 3월 부정 선거에 이르는 시기에 준비돼 온 것이기도 하다. 4월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상실의 시대로서의 1950년대
우리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매우 독특한 시대를 이루고 있다. 비극적인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실의 시대였을 수도 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서서히 준비해 나간 모색의 시대였을 수도 있다. 물론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을 돌아볼 때 아무래도 모색보다는 상실이 주는 무력감이 1950년대 우리 사회를 관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손창섭의 작품 <비오는 날>(1953)은 이렇게 시작한다. 손창섭이 표현하듯이 1950년대의 삶은 ‘비오는 날’, 다시 말해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다. 전쟁은 사회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파괴한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감, 좌절감, 상실감이 특히 1950년대 전반기 우리 사회의 주저음(主低音)을 이뤘다.

김호기 교수가 국회의사당 로비의 이승만 동상을 보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1950년대에 대체 어떤 일들이 진행됐기에 1953년 전쟁이 끝난지 7년 만에 1960년 4월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회운동이 분출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4월 혁명의 일차적 원인으로는 결국 독재로 귀결된 이승만 정권의 통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억압이 강화됐다고 해서 사회운동이 절로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4월 혁명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1950년대 시민사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2000년 4월 혁명 40주년을 맞이해 나는 ‘4월 혁명의 재조명: 사회학적 해석’(<문학과 사회> 50호, 2000)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나는 1950년대 시민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시민사회가 가족·자발적 결사체·사회운동·공론장으로 구성돼 있는 국가와 시장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이라면,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서구적 시민사회가 빠르게 정착돼 갔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는 1956년 전쟁 직전의 수준을 회복했으며, 삼백산업으로 대표되는 수입대체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도시경제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불어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적 생활양식과 미국식 대중문화의 급속한 유입은 시민사회의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시민사회 성장과 연관해 특히 주목할 것은 도시화, 공공 영역의 팽창, 반공이데올로기 강화다. 도시화의 경우 1949년 17.3%이던 도시화율이 1960년 28.0%로 증가했으며, 전쟁에 따른 피란민 증가와 이농민 유입은 도시화를 가속화한 주요 요인이었다.

1950년대 시민사회의 성장
이러한 도시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된 만큼 현대 도시의 이중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편에서 미국식 대중문화와 생활양식의 확산이 도시의 외양을 이뤘다면 다른 한편 도시 이면에는 향도이촌(向都移村)의 주변노동자가 급속히 퇴적하기 시작했다. 4월 혁명의 주도 세력 가운데 하나로 주변노동자 계층을 지목하는 것도 이런 과잉 도시화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도시화의 또 다른 주역은 학생 집단이었다. 농지개혁을 포함해 한국전쟁 이후 사회의 격렬한 재구조화 과정에서 교육은 사회 이동의 가장 용이하면서도 중요한 수단으로 자연스레 부상돼 왔다.

수도 서울은 단연 이 교육의 중심지였다.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5년 전국에 약 9만명의 대학생 가운데 4만2000명 정도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이 대학생 집단은 자신만의 독특한 청년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높은 민주적 정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버스 및 트럭과 함께 말이 끄는 달구지와 손수레가 지나가는 1950년대 말 무악재 거리. |경향신문

공론장이 급속히 팽창한 것도 1950년대 후반기 시민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당시 공론장을 주도한 것은 신문과 잡지였다. 특히 야당 성향이 강했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사상계>가 도시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4년 기독교방송과 1959년 문화방송이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방송 시대가 열렸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신문과 비교해 라디오 방송은 매체 성격상 오락 및 교양 기능이 두드러졌지만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한 보도 기능을 갖췄다는 점에서 대중에게는 또 다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여론의 풍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1959년의 경향신문 폐간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언론 탄압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그만큼 공론장이 국가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현대성이 강화되면서 공론장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영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고려할 때 1950년대 공론장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정치적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우리 시민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을 보완해 주는 만능의 권위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이승만 정권이 야당 및 반대 세력을 탄압하거나 제거하는 데 적극 활용됐다. 참혹한 한국전쟁의 체험 자체와 그에 따른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가 시민사회의 이념적, 집합적 행위 범위를 크게 축소시킨 것은 한국 시민사회의 발전에서 중대한 구조적 장애를 이뤘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반공규율사회’라고 부른 이러한 이데올로기 지형 아래서 반(反)정부 활동은 곧바로 반(反)국가와 친(親)공산주의 행위로 등치됐다. 1959년 조봉암 사형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제한된 시민사회의 범위는 1960년 4월 혁명은 물론 그 이후 사회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를 정리하면 1950년대 우리 사회의 변동은 정치 및 경제 변동 못지않게 시민사회의 성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장이 물론 곧바로 국가에 대항하는 정치적 폭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정치사회의 성숙 정도, 다시 말해 정당정치의 발전 정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정당정치가 제도화돼 있지 않은 경우 시민사회 내의 여러 세력은 정치사회 내의 반대세력과 연합해 국가에 대항하는 전면적인 사회운동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195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들. |경향신문

195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미국식 제도 확산,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 공론장 확장이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증대시켰음에도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할 수 있는 정당정치가 전혀 성숙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 정권은 권위주의 통치에 기반해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후퇴시켰다.

시민사회의 정치적 요구가 이처럼 제도화돼 있지 않을 경우 정치 갈등의 양상은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전면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1960년 4월 혁명으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테네시 월츠’와 ‘나는 가야지’
1950년대에 대해 내가 익힌 것은 당연히 연구 논문을 포함한 자료에 기반한 것이었다. 간접적 체험도 없지는 않다. 그것은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내게 1950년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낸 30대를 뜻하기도 하고, 사회학적으로 전후 복구가 이뤄진 후의 팍스아메리카나와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중문화의 사회학적 시각에서 내게 1950년대를 상징하는 것은 패티 페이지의 ‘테네시 월츠’(1950)와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1959)다. ‘테네시 월츠’가 사랑의 슬픔을 달콤하게 속삭이고 있다면 ‘나는 가야지’는 사랑의 슬픔을 애처롭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가야지’는 영화 <꿈은 사라지고>에서 나오는 곡이다. 노필이 감독하고 최무룡과 문정숙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당시 크게 히트했다고 한다. 내가 이 노래에 대해 특별한 기억을 갖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가 더러 부르셨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 멀리 나는 가야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 쓰라린 이 마음, 다시 못 오는 머나먼 길을 말없이 나는 가야지.”

아주 가끔 요즘도 이 노래를 들으면 저 멀리 흔들리는 풍경 속에 30대의 한 부부가 위태롭게 서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결혼해 첫 아이를 낳고 광복을 맞이한 두 사람은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체험한 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소박하지만 간절한 가족의 행복을 일구며 살아 왔다. 연구자의 관점을 떠나 개인적 관점에서 아주 가끔 부모님에게 결국 독재로 귀결된 제1공화국과 황량한 1950년대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노랫말을 빌리면 역사는 ‘다시 못 오는 머나먼 길’이다.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복구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이제 다시 못 오는 새로운 길, 새로운 시대의 문턱으로 나가고 있던 시간은 바로 1950년대일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나는 가야지’를 들었다. 저 멀리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30대 부부가 어설프지만 따듯한 미소를 내게 보내고 있다. 그리움에 쉽사리 잠을 못 이루는 밤이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