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일부 세력의 변절 ‘4·19혁명의 티’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5·16쿠데타 이후 자기부정 조짐… 군사정권 시절 출세의 길 달려

4·19혁명은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서야 ‘의거’에서 ‘혁명’으로 격상됐다. 5·16쿠데타 이후 유신, 12·12쿠데타, 5공, 6공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의 서슬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4·19혁명의 역사적 명예회복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 혁명 주도세력’을 자칭했던 대학 학생운동 지도부 가운데 일부는 혁명의 기운이 가라앉으면서 저항을 포기하거나 아예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길을 걸었다.

4·19혁명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이 넓은 공터에 모여 있다. |경향신문

4월 혁명에 대한 대학생 지도부의 자기부정 조짐은 5·16쿠데타 이후 서서히 나타났다. 1963년 군사정권은 4·19 3주년을 맞이해 4·19에 참가한 유공자 169명과 부상자 180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문제가 된 것은 당시 포상대장자 선정이 정부 요청에 따라 각 대학 총장이 추천한 사람들로 한정되면서 4·19 이후 통일운동을 주도한 민족통일연맹(민통련) 관련 학생들이 배제됐다는 점이다. 포상 대상자 대부분은 정부 결정을 수용했다. 사월혁명연구소가 펴낸 <한국사회 변혁운동과 사월혁명>(한길사·1990)은 이를 “정치권력과 4월 혁명 세력 간의 (비록 일부이긴 하나) 상호의존적인 공존의 가능성을 타진한 최초의 암묵적인 타협의 성격을 갖는다”고 평가했다.

“10월 유신은 4·19정신의 계승”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를 표방한 6·3운동은 4·19세대 내의 상이한 정치적 지향점이 표출되는 계기가 됐다. 6·3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4·19혁명 당시 대학 저학년 또는 고등학생이었다. 4·19혁명 당시 학생 지도부는 6·3운동을 주도한 학생 지도부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표출했다. 안병규, 윤식, 이영일, 이수정, 황활원 등 서울대 학생 지도부는 6·3운동 지도부의 투쟁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학생 데모가 이룩하는 최고 형태가 민주혁명이지만 우리의 주어진 여건은 혁명을 용납하지 않으며, 애국적인 사고나 행동은 우리 이외에 군부나 정계나 기타 각계가 마찬가지로 갖고 있다”는 이유였다. 반면에 서정복(서울대), 김승균(성균관대), 김시현(전남대) 등은 6·3운동 주도 세력을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6·3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이들 4·19 학생 지도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5·16쿠데타를 추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1970년 4월 서울 묵정동 학생회관에서 열린 ‘4·19 1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이들은 “4·19와 5·16의 두 혁명은 서로 반동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관관계에 있으므로 공통의 역사적 연면성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정사적 견해”(이영일)라고 주장했다.

압권은 1972년 유신 직후 나타난 4·19 학생 지도부의 행적이다. 동아일보의 1972년 11월18일자 보도에 따르면 “4·19에 참여한 4·19세대 45명은 16일 오후 6시 일륙민족상회의실에서 회합을 갖고 10월 유신을 적극 지지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날짜 매일경제는 선언문 전문을 실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10월 유신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내실 있는 자강체제의 확립을 위한 일대 영단”이자 “10월 유신이야말로 4·19정신의 계승”이라고 치켜올렸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이들은 “지금처럼 민족중흥과 통일의 대도를 대담하게 실천하고 강행군할 수 있는 지도자의 예지와 결단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면서 “세계사의 조류는 더 이상 우리에게 주저와 방황의 시간을 허용치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우리 모두 이 새 역사의 창조에, 장엄한 대열에 불퇴전의 결의로 흔쾌히 참여하자”고 선동하면서 끝난다.

민정당 공천으로 다수 국회 입성

4·19혁명 때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 |경향신문

6·3운동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던 이들 가운데 안병규와 윤식을 포함해 박찬세, 손진영, 이재환, 이세기, 정창화, 유용태, 김혁동 등 45명의 4·19 학생 지도부가 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4월혁명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군사정권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이후 차례로 군사정권에 투신해 출세의 길을 걸었다.

4·19 당시 서울대 학생위원장이던 안병규는 1960년 10월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난국수습의 길’에서 1960년 7·29총선 이후 탄생한 국회가 혁명을 배반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0년 뒤 그는 “최고영도자가 강인하고도 확고한 체제 개혁 의지로 펼치는 10월 유신은 곧 우리가 염원해 온 완전혁명이며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극 참여키로 했다”라고 한 신문에 기고했다. 안병규는 1980년대 들어 12·12쿠데타 세력의 국보위에서 문공분과 위원으로 참여했고, 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민정당 공천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제5공화국 국정 방향과 4·19정신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족통일연맹 간부였던 이영일(서울대)은 5·16 이후 구속됐으나 1980년 민정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국회 문공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0년 11월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해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던 윤식(서울대)도 5·16 직후에는 감옥에 수감됐으나 유신 이후 유정회의 일원이 됐다. 유정회는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의장이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추천으로 선거 없이 뽑힌 국회의원들의 교섭단체로, 국회에서 사실상 대통령의 친위대 구실을 했다.

‘4·19 선언문’을 작성한 이수정(서울대)은 유신 이후 문공부 해외공보관, 1980년대에는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청와대 대변인 등을 지냈다. 황선필(서울대)은 박정희 정권 때 홍보조정관, 전두환 정권 때는 청와대 대변인을 각각 지냈다. 이세기, 염길정, 조남조, 윤석순, 정남, 정창화 등 4·19 학생 지도부는 모두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물론 4·19 학생 지도부 전부가 입신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6·3운동 지지를 표명한 4·19 학생 지도부 가운데 서정복, 황건, 하일민, 김정강(이상 서울대), 김승균(성균관대), 정만진(대구대) 등은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4월혁명 당시 경희대 민통련 위원장이었던 이수병은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사형당했다. 1980년대 진보적 학술운동의 대부였던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도 4·19 학생 지도부 출신이다.

일부 4·19 주도 세력의 변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19혁명 정신 계승을 내걸고 있는 민간단체인 ‘4월회’의 김광용 사무총장은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와 유신으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건 마땅히 비판해야 하지만 4·19혁명 주도 세력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참여한 사람은 극소수”라고 변호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 지도부 가운데 변절자들은 4월혁명이 그 이후에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긴 흐름 속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체제 내부로 들어갔다”고 평가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