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88둥이, 유쾌하고 당당한 ‘자아실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어린 선수들은 이전의 선배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이들은 성적의 중압감을 떨쳐낸 듯 경기를 즐기고 최선에 만족한다. 그리고 당당하다. 특정 연령대에 몰린 이들을 보고 또 하나의 세대론이 떠오르고 있다. 스포츠 스타들의 특성은 또래 전체의 특성인가….

김연아, 모태범, 이승훈, 이상화, 이정수, 곽윤기. 밴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특정 연령대에 몰려 있다. 이승훈과 김연아는 각각 1988년과 1990년에 태어났다. 이상화, 모태범, 이정수, 곽윤기는 모두 1989년생이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환은 1989년생,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이용대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이청용도 1988년생으로 밴쿠버의 선수들과 동일한 연령대다.

2년 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동계올림픽에서도 빼어난 기량과 당당한 태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들이 특정 연령대에 몰리면서 또 하나의 세대론이 떠오르고 있다. ‘88둥이’ ‘G세대’ ‘V세대’ ‘쾌속세대’ 등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기성세대가 지칭하는 대상은 하나다. 1988년을 전후해 태어난 20대 초반 청년들이다.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어떤 점에서 새로운가. 이 세대에 주목하게 만든 계기
를 제공한 스포츠 선수들을 중심으로 보면 기성세대가 놀라는 건 이들이 이전 세대 국가대표들과는 달리 국가와 민족의 중압감을 떨쳐낸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세계 2위의 성적을 올리고도 금메달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다거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국가 위상이나 민족적 자긍심과 결부시키지도 않는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오로지 금메달만을 위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달려드는 전투적 자세도 옛말이 됐다. 올림픽이든 세계선수권이든 ‘출전’이 아니라 ‘참가’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들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집단적 가치에도 강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말과 행동 차원에서 발랄함과 당당함과 유쾌함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스포츠 스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스포츠 스타들의 특성을 또래 전체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세대론이 남발되는 느낌이 없지 않다”면서도 “그 세대의 특성이 선수들 문화에도 반영돼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 ‘역사적 경험’
사회학에서는 특정 시기에 태어난 동년배 집단은 동일한 시기에 경험한 같은 역사적 사건의 영향을 받아 행동과 의식에서 동일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신세대 스타들이 지난 2월 28일 오후(한국시간) 밴쿠버 팬 퍼시픽 호텔에서 열린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모태범이 지난 2월 18일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딴 뒤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88둥이들의 세대적 특성을 규정하는 ‘역사적 경험’은 무엇일까.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또렷한 표지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다. 김 교수는 “이 세대는 1980년대 3저 호황으로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에 출생했고,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개인주의 성향과 자의식이 강하다”고 짚었다. 정치·사회적 변곡점이 몇 가지 더 있다. 10대에 들어선 이후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이라는 거대한 축제문화를 경험했다. 막 20대로 진입할 무렵에는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혁의 에너지에 직접 참여했다. 무엇보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쌍방향 소통문화가 이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학계에서는 2년 전에도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2008년 촛불집회 초기 국면을 주도하던 10대들을 설명하기 위해 ‘2.0세대’ ‘386 2세’ ‘생활정치’ 등 다양한 명칭이 나왔다. 김 교수는 당시 발표한 한 논문에서 그들을 ‘2.0세대’라고 불렀다. 1988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는 연령적으로 당시 김 교수가 분석한 2.0세대와 사실상 중첩된다.

김 교수는 ‘2.0세대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2.0세대는 인터넷 공간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자아의식과 사회의식을 스스로 형성해 가는 10대들을 지칭한다”고 규정했다. ‘386세대’가 민주화 1.0세대라면 1990년대 초반에 20대가 된 ‘신세대’는 정보화 1.0세대다. 2.0세대는 민주화와 정보화의 바탕 위에 출현한 세대다.

2.0세대는 인터넷과 모바일을 바탕으로 디지털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미니홈피, 블로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활용해 정보와 견해를 동시다발적으로 주고받는다. 소통의 디지털적 특성은 풍자, 신조어, 패러디, 댓글놀이 등 획일적인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틀 자체도 바뀌었다. 이들에게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판단 기준 대신 ‘좋고 싫음’이라는 심미적 판단 기준이 더 중요하다. 이 때문에 취향과 스타일을 중요시한다. 김 교수는 그 결과 우리 사회 공론장이 “논리와 토론이 오가는 숙의적 공론장 중심에서 이미지와 상징을 매개로 감수성과 정서적 요인이 중시되는 심미적 공론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논리적으로 설득당하기 전에 정서적으로 공감해야만 행동한다는 얘기다.

88둥이로 불리든 2.0세대로 불리든 새로운 세대의 머리에는 개인주의가 장착돼 있고 몸은 디지털 감성으로 충만하다. 그렇다면 이 세대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기성세대의 욕망의 정치에 반해 자아실현을 중시한다”고 봤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도 ‘자아실현’을 키워드로 꼽았다. 그는 “지금 선수들은 국가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해 훈련한다. 민족 같은 집단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국가에서 개인들의 복합체로서의 국가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이 더 중요
이 교수는 자아실현을 최상위의 가치로 삼는 개인을 ‘자기계발적 주체’라고 부른다. 승진과 업무효율성 향상을 위해 자기계발을 하는 직장인처럼 자신의 능력 향상에 몰두하는 개인이라는 뜻이다.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자아실현은 해당 종목이 요구하는 신체적 기능을 극대화하는 일일 테지만, 이 세대의 평범한 개인들에게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펙 만들기’의 다른 말이다. 이 교수는 “지금 20대에 진입하고 있는 세대는 스펙을 강화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촛불집회는 신세대의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보여 줬다. 사진은 지난 2008년 5월 촛불집회에 참여한 10대들. |김영민 기자

2.0세대나 88둥이 같은 말이 나오기 이전에 20대를 규정해 온 가장 강력한 세대 규정은 ‘88만원 세대’다. ‘88만원 세대’ 담론은 외환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20대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보면서 20대에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강의를 해 보면 지금 청년들은 88만원 세대 담론의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결론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이전 세대는 개인의 능력으로 돌파하지 못하는 문제를 사회 구조 탓으로 돌렸지만 새로운 세대는 그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성세대의 세대 규정에 거부감도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다. 서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을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으로 풀었다. 외환 위기 이후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노동유연성을 강화하는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그 결과 새롭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능력’과 ‘경력’과 ‘스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기계발을 하는 시민으로 변모했다는 내용이다. 서 교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권위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그렇게 얻은 자유는 자기계발을 통해 신자유주의 질서에 포섭됐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외모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것도 그러한 현상의 방증이다.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는 마음의 배경에는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뚱뚱한 사람은 자기 몸 관리에 실패한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자산관리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신세대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광도 마찬가지다. 김연아는 자기관리에 성공한 개인이라는 이미지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기성 세대의 세대 규정 논의에 거부감을 보인다. 1985년생인 박은하씨는 “1988년 이후 태어난 세대의 특성은 1985년생들도 갖고 있다. 출생연도로 구분하는 건 기계적이다. 10대인 때는 ‘발랄한 10대’라고 하더니 20대가 되니 ‘우울한 20대’라고 한다”라고 꼬집었다. 1989년생인 박연씨는 “몇몇 올림픽 선수들을 우리 또래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사례로 볼 수 없다. 또래라는 것 말고 무슨 공통점이 있나. 조선일보에서 말하는 G세대는 글로벌을 강조하면서 해외로 나가든지 능력을 기르라는 얘기인데, 이는 우리 또래의 문제를 모두 우리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얘기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새로운 세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수직적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수평적 연대를 지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 중 한 명이 비정규직으로 떨어지는 가혹한 생존경쟁에 몰려 있다. 발랄하지만 현실의 중압감은 언제든 이들을 덮칠 태세다. 이 딜레마를 풀 방법은 없을까.

이택광 교수는 “지금은 대안이 없다”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본다. 그는 “촛불을 보면 지금 세대는 나름대로의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인터넷생활카페인 ‘쌍코’나 ‘소울드레서’가 보여 주듯이 이들은 소비자 권리의 문제가 이슈가 되면 과감하게 정치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짚었다. 김호기 교수는 “서열체제의 대학에 입학하거나 양극화된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 이들이 냉혹한 현실에서 좌절을 겪을 수 있다”면서도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지반을 이루고 나아가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시민적 주체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