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그들은 선배들과 확연히 달랐다

밴쿠버에서의 ‘88둥이 스타 표정’… 개성 넘치는 톡톡 튀는 매력 발산

2010 밴쿠버 올림픽은 ‘뉴페이스’의 천국이었다. 이승훈(22), 모태범(21), 이상화(21·이상 한국체대), 이정수(21·단국대).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김연아(20·고려대)를 제외하면 모두가 뜻밖의 얼굴이다.

밴쿠버 올림픽 88둥이 스타들.왼쪽부터 모태범, 이정수, 이상화, 김연아, 이승훈, 곽윤기.

우승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들 선수는 모두 1988~1989년생이다.

몇 세대가 지나도 그대로 사용되는 ‘신세대’라는 수식어. 이 표현이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신선도가 넘쳐나는 밴쿠버 영웅들의 톡톡 튀는 매력을 파헤쳐 본다.
　

쿨한 성격 |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을 딴 이상화는 이틀 뒤 1000m에서 23위를 했다. 36명 가운데 23위. 순식간에 1등에서 하위권으로 곤두박질했지만 경기를 마친 이상화는 이날 밴쿠버 올림픽 기간에 모든 선수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차피 1000m는 제 주력 종목이 아니잖아요. 왕베이싱(24위)보다는 잘했구만, 뭘.” 희한하게 생각하는 취재진에게 이상화가 쾌활하게 웃으며 내놓은 대답이다.
쿨하다. 할 것은 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안다. 승부 근성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김광현, 류현진, 윤석민, 이용규, 김현수 등 베이징 올림픽부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까지 한국야구 신화를 쓴 20대 초반 젊은 야구 선수들처럼 밴쿠버의 젊은 영웅들도 쿨한 성격을 지녔다.

경기 전에 결과를 걱정하며 벌벌 떠는 선수는 없었다. 이들은 어차피 우승 후보가 아니라며 경기 자체를 즐긴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우승한 모태범은 “경기를 즐겼다. 부담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500m에서 우승한 뒤 이틀만에 1000m까지 은메달을 따냈다. 편한 마음에 실력이 따랐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 올림픽에 도전해 또 실패한 대한민국 대표 스케이터 이규혁(32)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도전해야 하는 것이 슬펐다”고 했다. 나이와 경험 차이인지 모르지만 그런 부담감 자체가 이들 젊은 선수에게는 아예 없었다.

뛰어난 언변 | 당당하게 관심을 즐긴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메달리스트들의 공식 기자회견. 올림픽, 더욱이 금메달리스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질문이 나왔다.

“자기 소개 좀 해 주세요.”
프로필조차 변변히 나와 있지 않은 모태범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외신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위험한 것을 좋아하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모두 좋아하는 등 스릴을 즐기는 학생입니다.” 모태범의 당당하고 깜찍한 대답에 외신기자들은 미소를 지었다.

밴쿠버 88둥이들의 대답에는 기지가 넘쳤다. 그들이 따낸 금메달처럼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 가면 뭐할 거냐’는 질문에 모태범은 “(이)승훈이랑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사람들이 알아보나 확인해 보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5000m 은메달에 이어 1만m 금메달로 세계 장거리를 제패한 이승훈은 포상금을 어디다 쓸 거냐는 질문에 “태범이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지만 밝힐 수는 없다”며 모종의 사업 계획이 있음을 암시했다.

밴쿠버 최고의 입심을 자랑한 이상화는 스피드스케이팅의 선전에 대해 “피겨스케이팅에 항상 묻혔는데 잘됐다”고 솔직하게 털어놨고, 서로의 이상형을 밝혀달라고 하자 모태범은 이승훈에게 귀엣말로 주문한다. 이승훈은 “모태범에게는 소녀시대 유리가 어울린다”고 반강제로 털어놨다.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거리낌 없이 밝힐 줄 안다.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은메달을 딴 곽윤기(21·연세대)는 시상대에서 미처 보이지 못한 ‘SAVE THE HAITI’ 티셔츠 세리머니를 믹스트존에서 펼쳐보이며 말했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평화를 위한 대회잖아요.” 언론을 잘 아는 곽윤기의 깜찍한 ‘자기PR’에 한국 취재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패셔니스타 | 외모는 기본이다
88둥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운동도 자신을 위해서 한다.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할래요”는 그 옛날 영웅들의 레퍼토리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 선수의 가장 큰 특징은 외모에서부터 나타난다.

5000m 은메달로 한국에 이번 대회 첫 메달을 안긴 이승훈은 연예인 못지 않게 잘생긴 얼굴로 단숨에 훈남으로 등극했고, 쇼트트랙 2관왕 이정수는 새하얗고 주먹만한 얼굴에다 깜찍한 표정으로 ‘최고의 금메달 표정’에 뽑혔다. 쇼트트랙 500m 은메달리스트 성시백(23·용인시청)은 늘씬한 몸매에 훈훈한 얼굴로 ‘섹시백’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상화 역시 청순한 얼굴과 근사한 몸매로 ‘빙판 위의 신세경’으로 불리고 있다.

기본 바탕에 자신을 꾸미는 솜씨와 노력이 평범하지는 않다.
전 같으면 아마추어 선수들에게서 보기 힘들었을 액세서리는 이제 너무 흔하다. 이상화의 ‘슈퍼맨 귀걸이’는 대회 전부터 유명했고, 18K ‘나이키 귀걸이’는 모태범 때문에 다시 유행하고 있다.

이상화는 1000m까지 대회를 모두 마친 뒤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파마 머리로 나타났다.
“어디서 얼마 주고 했느냐”는 질문에 “경기도 없고 할 일이 없어 숙소에서 혼자 해 봤다”며 웃는다.

이정수는 대회 참가 전에 머리를 파마했고, 역시 파마한 머리에 왁스를 바른 모태범은 경기 후면 눌려 있는 머리를 다시 세우느라 손이 바쁘다. 불교신자인 그의 손목에는 염주 팔찌가 채워져 있다.

압권은 곽윤기의 헤어스타일이다. 오른쪽만 길러 웨이브를 넣은 곽윤기는 훈련 중에도 틈만 나면 헬멧을 벗어 헤어스타일을 정리한다.
모두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밉살스럽지 않다.

쇼맨십 | 평범한 시상식은 거부한다
올림픽 시상식 단골 장면은 ‘눈물’이다. 4년, 그 이상 올림픽 하나 보고 뛰어온 그동안의 세월과 고마운 얼굴이 떠오르면 자연스레 떨어지는 게 메달리스트의 눈물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메달을 걸고 또는 우승을 확정하고 눈물을 흘린 한국 선수는 김연아 딱 한 명이었다.

모태범이 유명해진 것은 금메달보다 춤이었다. 500m 금메달을 딴 뒤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클럽 삼아 신나게 몸을 놀리던 모습에 전 세계가 신선함을 느꼈다.
1000m까지 은메달을 따낸 뒤에도 “아깝다”고 박수를 ‘딱’ 치더니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난다”며 유쾌하게 웃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신세대 그 자체다.

모태범도, 이상화도, 이승훈도 시상대에 오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냥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

쇼트트랙 1000m 금메달로 2관왕에 오른 뒤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이정수는 플라워 세리머니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관중석으로 꽃다발을 던졌다. ‘어디로 가든 나는 몰라’라는 듯 두 눈 꼭 감고 꽃다발을 던지는 모습에 여성 팬이 수천명 더 생겼다.

곽윤기는 남자 5000m 계주 은메달을 거머쥔 뒤 시상대에서 ‘시건방춤’을 췄다. 함께 뛴 선수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즉흥적인 세리머니였다. 시상식에서마저도 톡톡 튀는 신세대 영웅들의 모습. 모든 요소에 스타성이 충분하다.

<김은진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