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우회 야체이카 맡아 지하투쟁
개천을 끼고 삼청동 막바지가 거진 끝나도록 올라가다가 호젓한 골목으로 열 걸음쯤 구부러지면 좁직한 ‘산파’간판이 붙은 양옥에 조원숙 여사가 묵고 있었다. ‘여성동우회’ ‘근우회’ ‘6·10만세사건’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을 거쳐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한 것까지를 알고 있는 기자는 “상해에서의 결혼생활과 그 후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하고 물었다.
상해 망명중 만난 남편 모스크바로
“상해에서 양명이라는 남성동지와 만나 극히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을 시작했죠. 그때 난 서른 살이었드랬는데, 안온한 가정생활이 그리운 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마는 그인 밤낮을 가림이 없이 연락사업에 바빴고 때로는 소련 연안 등지로 장기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동거생활 3개년에 한 달을 함께 살아본 일이 없어요. 그땐 나두 열심히 공부는 했댔어요.”
“그 다음 그분은 어데로 가셨습니까?”
“모르죠. 폭풍전야에 모스크바로 간다고 가버렸는데 어데 소식이 있어요.”
“그게 몇 년 전 일입니까?”
“그때 배 안에 들었든 애가 지금 열여섯 살이니까 17년 전이군요. 그동안 전연 종적을 모르죠. 그 다음 나는 그이의 고향인 경상도 거제도 섬 속에 들어가서 하고 많은 날 시어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무 배추를 매 가꾸면서 그만 이렇게 늙어버렸답니다. 호호…. 이 시집살이 하는 동안 나의 운동이란 극히 미온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운동이란 오히려 저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기에 필요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큰 키에 걸맞은 머리털하고 안경 밑에 언제나 이지적인 눈이 노리고 있는 여사가 갑자기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일지 모르나 드물게 보는 일일 게다. 마지막으로 여사는 “지금부터의 운동은 새로운 동무들에 절대적으로 믿는 바가 큽니다. 새 세대는 새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우리 같은 늙은이는 억지로 젊어지려는 노력에서만 용기를 얻습니다”라고 말했다.
병정구두의 복잡한 구두끈을 맬 때 벌써 해가 저물어 갔다.
‘폭풍전야에 헤어져 기다릴 길 없는 남편’이라는 제목이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20일치.
“우리 같은 늙은이”라고 말하는 조원숙(趙元淑, 1906~?)은 강원도 양양(襄陽)에서 태어났다. 1924년 우리나라에서 맨처음 생겨난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에 들어가 집행위원이 됐다. 1926년 6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조두원과 함께 들어간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으로 왜경에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다음해 4월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 5월 근우회 집행위원 및 서부부원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근우회 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어 28년 2월까지 활동했다. 지하투쟁을 하던 중 8·15를 맞아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간 다음 소식이 없는 남편 양명(梁明, 1902~?)은 경남 통영 앞바다 거제도의 가멸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19년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문과에 들어갔다. 24년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들어가 기관지 <혁명>을 만들다가 25년 8월 귀국하여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들어갔고, 다음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가 그만두고 27년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상해를 다녀온 다음 조공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27년 11월 초 고공청 책임비서였던 김준연(金俊淵, 1895~1971)에게 모든 당무와 후계당 조직을 위임받았다. 김세연(金世淵, 1899~?)에게 후계 책임비서를 맡기고 중국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조공 선전활동을 하다가 1930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구원이 되었고, 1934년쯤 외국문 출판사 조선어 담당이 되었다.
전남 영암 출신 대지주 아들인 김준연은 경성제일고보와 동경제대와 독일 베를린대학을 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있다가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모스크바 특파원을 하다 돌아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하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조공에서 발을 뺄 낌새를 보이다가 양명한테 고공청 당권을 빼앗겼던 것이고, 28년 2월 ‘제3차 조공사건’으로 7년 징역을 살고 나와 8·15 뒤 한국민주당에 들어가 법무부 장관과 5선 국회의원을 하였다.
오라버니 조두원과 함께 검거돼
조두원(趙斗元, 1905~?)은 연희전문 문과를 다녔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나왔다. 25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고, 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경성부 제2구 제2야체이카가 되었는데, 조공 재건을 위하여 운동하라는 코민테른 지시를 받고 돌아온 것이 29년 6월이었다. 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다가 잡혀 징역 3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 “조선민족 해방투쟁 만세!” “조선공산당 만세!”를 외치다가 징역 6월을 추가받았다. 33년 10월 만기출옥한 다음 위장전향서를 써주고 운동을 지속하다가 왜경한테 잡혀 죽을 곤욕을 치르던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당면의 가장 필요한 문제는 조선 좌익의 통일문제의 해결이다. 일본제국주의는 무장한 채로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 형편으로… 지주와 대뿌르조아지들의 반동적 반민주적 운동은 간모술책을 가지고 좌익 내부에 그 손을 뻗쳐오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당하여 지하운동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그룹들과 출감한 전투적 동지들이 중심이 되고서야 당이 재건될 것이다. 과거의 파벌 두령이나 운동을 휴식한 분자는 아무리 명성이 높다고 해도 이번 중앙에는 들어올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당은 재건될 것이다.”
재건파 중앙 박헌영의 보고였다. 1945년 9월 8일 서울 계동에 있는 어느 주의자 집이었다. 이영, 최익한, 정백, 정재달, 하필원, 이승엽, 이정윤, 현칠종, 안기성, 이우적, 김상혁, 정종근, 강병도, 조두원, 권오설, 최원택, 이청원, 김두현, 홍인의 등 장안파 6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박헌영의 보고가 끝나자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청원과 이영, 최익한이 장안파와 통일될 당과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고, 이정윤이 장안파의 결함을 이야기하였을 때, 조두원이 말하였다.
“당 결성에 있어서 두 개 그룹과의 혁명적 합류가 필요한데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혁명적 재건 그룹에 다른 그룹이 합류함이오, 다른 길은 재건그룹과 대등한 형태로 통일하는 것이니, 이것은 오랜 시일을 경과하는 것이라 불가하다. 한 가지 길은 재건그룹에 모두 합류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과거의 소소한 문제 토론보다 통일 실현이 첫째 임무이다.”(옳소!)
이우적이 뒤를 받았다.
“왈가왈부는 물론하고 박동무 의견에 신뢰하고 찬성하여 결정함이 가하다.(옳소!)
최익한 시야기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전체적이어야 한다. 조직은 생명이다.
강병도 박 동무의 정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장안당과의 관계만 선명히 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최익한 당재건준비위원회의 테제는 개량적이요 경제주의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이다. 어떻게 이러한 그룹과 같이 통일할 수 있느냐? 박헌영 동무 의견에 대한 가부를 거수로 가결할 것을 요구한다.
조두원 볼셰비키 당에서는 이렇게 쓸데없는 이론을 가지고 복잡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오. 보고자의 보고가 있은 후에 각기 토론이 전개된 후 보고자가 다시 결론을 짓고 이에 대한 동무의 태도를 가하거나 부하거나를 결정하는 것이오. 그러나 이만하면 토론은 넉넉하오. 속히 박 동무의 결론을 들읍시다.
48년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것으로 이른바 장안파는 해체되고 박헌영을 당중앙으로 하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는데, 존경받는 한학자인 최익한(崔益翰, 1897~?) 반발을 누르고 토론을 종결짓는 조두원 논리는 빈틈없는 것이었다.
이우적·정태식과 함께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로 꼽히던 사람이다. 월북한 다음 조일명(趙一明)이라는 이름으로 박헌영 수행비서를 하였고, 이승엽, 이강국, 배철, 박승원, 윤순달, 조용복, 맹종호, 임화, 설정식 동무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헌영 세 번째 부인이 된 윤레나(윤옥)는 조두원 처제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맡아 맑스레닌주의를 바탕삼은 공산주의 이론 수문장 구실을 하였다. 민전 중앙위원과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으며 47년 6월부터 <노력인민> 주필로 있다가 월북한 것이 47년 12월이었다.
남로당 출신들이 모여 있던 해주에서 제1인쇄소 출판부장을 하였고, 50년 8월 ‘서울해방’ 때 서울시인민위원회 계획위원장을 하였다. 51년 5월 <민주조선> 부주필, 11월 문화선전성 부상이 되었다가, 공화국 정권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였다. 이우적은50년 9월 미군 서울진공 때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정태식은 50년 4월 김삼룡·이주하와 함께 잡혀 20년 징역을 선고받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50년 6월 27일 입성한 인민군에게 ‘해방’되어 <해방일보>를 복간하고 논설위원이 된다. 인민군 퇴각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농림성 기획처 부처장을 하다가 남로당 숙청 때 잡지 <인민> 교정법사를 하던 중 사라졌다.
재건파 사람들이 거의 전멸당한 반면 장안파 사람들은 승승장구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이영(李英, 1889~?)으로 박헌영 그룹을 조선공산주의 역사에서 빼버리기 위한 정치공학적 책략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1953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하였고 1959년까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의원 및 의장으로 있었다. 면우 곽종석(郭鍾錫) 제자로 한학에 밝았던 최익한은 월북 후 정치를 접고 국학 연구에 몰두하여 55년 <실학파와 정다산>을 펴내었다. 정백(鄭栢, 1899~1950)은 49년 전향하여 국민보도연맹 간사장으로 있으며 이승만정권에 협력하였는데, 6·25때 서울시인민위원장으로 내려온 이승엽(李承燁, 1905~1953)에 의하여 민족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하였다.
조원숙 자취는 알 길이 없다. 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다음부터는 아무런 자취가 없다. 오라버니와 함께 처형당하지는 않았더라도 여류혁명가 조원숙에게는 밟아나가야 할 ‘역사’가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 이런 구호를 외쳤을까.
“여남평등 이룩하여 평등조선 건설하자!”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