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M&A 통해 현대 브랜드 다시 모으자”

현대 계열사들, 현대건설 하이닉스 현대오일뱅크 등 주시

2002년 치워졌던 ‘현대(現代)’ 표지석이 5년 만에 다시 설치됐다. 현대그룹 중 현대아산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계동사옥의 주인은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범 현대가에 그룹의 사활을 건 전운이 감돌고 있다.

‘현대(現代)’라는 브랜드를 쓰지 않는 기업을 손가락으로 꼽기는 어렵다. 너도나도 ‘현대’라는 브랜드를 쓰기 때문이다. 현대차, 현대모비스, 현대산업개발,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상선, 현대아산, 현대백화점, 현대캐피탈, 현대해상, 현대택배, 현대제철, 현대카드, 현대증권…. 나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현대라는 브랜드를 쓰는 기업이 많은 것은 현대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형제와 자손이 많기 때문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6남 1녀의 장남이었다. 남동생 다섯 명, 여동생 한 명이다. 게다가 정 명예회장은 아들 여덟 명에 딸 하나를 뒀다. 여기에 정 회장의 남동생 다섯과 여동생은 각기 아들, 딸을 낳았다.

2003년 1차시도 여론에 밀려 포기

범 현대가의 재결집에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좌장 격으로 나섰다. 정씨 가문의 현대가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그는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범 현대가를 이끌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정 명예회장과 같은 영(永)자 항렬에 있는 동생 중 정상영 KCC 명예회장만 생존해 있다. 1세대 현대 경영인들은 경영에서 손을 뗐고, 2·3세대 현대가 아들들이 대통(大通)을 이어받아 현장에서 경영을 맡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2001년 3월 21일 이후 ‘현대가’는 다소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후계구도가 만들어졌고, ‘왕자의 난(王子의 亂)’을 거친 후 정 회장의 2남이었던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그룹을 이어받았다. 3남은 백화점 그룹을 받았고, 5남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상선과 현대아산 등을, 6남인 정몽준 의원은 현대중공업 등을 받았다.

계열사를 나눠 받는 과정에서 적잖은 분란이 있었던 현대가는 이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 소식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정몽헌 회장의 자살 후 정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KCC그룹의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정통성 논란이 일었고, 범(汎) 현대가라는 울타리에 현대 브랜드를 모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정상영 KCC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범 현대가는 현정은 회장을 도우려는 여론에 밀려 현대그룹 경영권을 장악하려던 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2003년도였고, 5년여 시간이 흘렀다. 2008년 일부 현대가 기업들의 재집결 분위기가 주목받고 있다. 2000년대 전후반 국내 경기 침체기에 맞춰 현대가에서 경영권을 상실했거나, 외국계 기업 등으로 넘어갔던 기업들을 대상으로 다시 모이고 있는 것.

이 중의 핵심은 ‘현대건설’에 있다. 이미 M&A(기업인수합병) 시장에 매물로 나온 현대건설은 가격만 8조~10조 원가량일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최근 현대건설의 주가가 급등하는 것과 함께 현대가 기업들의 관심은 물론 건설 쪽 사업 진출을 고민하는 기업들의 관심까지 가세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현대건설은 향후 범 현대가 재집결의 ‘바로미터’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현대건설은 현대상선의 지분 8.3%를 갖고 있다. 게다가 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등은 현 회장의 현대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의 지분을 각각 17.6%, 7.87%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 KCC가 5.98%, 현대백화점그룹이 2% 안팎의 지분율을 소유하고 있다.

현재 현대건설에 M&A 러브콜을 던지고 있는 기업은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계열 등이 있다. 현대건설이 누구에 M&A되느냐에 따라 향후 범 현대가의 구도가 개편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2007년 현대상선 주총에서 KCC, 현대백화점 등은 현대상선이 신주를 우호적인 제3자에게 넘길 수 있도록 한 정관 변경 안건을 반대한 바 있다.

당시 현 회장의 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범 현대가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3년 임기인 2010년 주총에서 현 회장의 재신임 여부에 대해 이들 KCC, 현대백화점 등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일 현대중공업이나 KCC가 현대건설을 인수해 막강한 지분력을 바탕으로 현 회장을 불신임할 경우 현대그룹의 향배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힐 수 있다.

물밑에서 M&A를 통해 범 현대가의 재집결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과 반대로 물 위에서는 과거 범 현대가 식구였던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를 활발히 지원하면서 범 현대가 재집결 분위기를 한층 무르익게 만들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바로 밑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이끌던 한라그룹은 그룹이 어려워지면서 만도를 외국계 자본에 넘겨야 했다. 10여 년 후 정인영 회장의 아들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집안 큰 형님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과 영자 항렬 중 유일한 생존자인 KCC 정상영 명예회장의 후원을 받아 만도를 재인수했다. 정몽원 회장은 얼마 전 기자들과 만나 “만도 인수 후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께 전화했더니 최고의 품질과 투명경영을 기대한다고 격려하시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지난 3월 17일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해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아직까지 정 회장은 범 현대가의 현대건설 인수전에 중립을 지키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자체적인 자동차 부품회사인 현대모비스를 갖고 있으며 그동안 만도의 자동차 부품 공급 비율을 조금씩 줄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정몽원 회장이 만도를 재인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게다가 한라그룹의 만도 인수전에는 KCC가 백기사 역할을 하며 등장하기도 했다. 그동안 KCC는 일부 현대가 기업들이 재집결하는 데 총대를 메왔고, 현대그룹과의 현대상선 적대적 M&A 시도 때도 등장한 바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 어른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라는 브랜드를 다시 세우고 싶은 듯하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동안 범 현대가에서 경영권을 상실한 하이닉스, 현대종합상사, 현대오일뱅크 등도 범 현대가 기업들의 M&A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현대종합상사는 현대맨들의 범 현대가 기업 맞이하기가 시작됐다는 내부 분위기가 전해진다.

현대건설 인수 여부가 최대 관건
현대오일뱅크 역시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M&A 시장에 다크호스로 떠오른 현대중공업 계열에 넘어갈 확률이 높다. 지난 25일 현대중공업은 공시를 통해 현대오일뱅크 최대주주인 IPIC 측에 현대오일뱅크 주식 전량(70%)에 대한 주식매입권리(Deemed Offer) 행사를 통지하기로 했다. 이는 현대오일뱅크 주식 19.8%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이 IPIC가 갖고 있는 현대오일뱅크 주식 1억7155만7695주를 매입해, 현대오일뱅크를 다시 범 현대가 식구로 끌어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대건설은 물론 현대종합상사, 현대오일뱅크 등에 대한 M&A가 마무리되면 일단 범 현대가는 몽(夢)자 계열에서 선(宣) 항렬로 경영권 승계작업이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우 정몽근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회장에 아들 정지선씨를 올리기도 했다.

허연회<헤럴드경제 산업부 재계팀 기자> okidoki@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