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문의 길]느린 삶을 위하여 슬로시티 담양 창평의 설맞이

고샅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망졸망한 낮은 돌담장들은 구구각각 제멋대로 들고나면서도 어김없이 길을 내고, 스스로 그 길을 따라갑니다. 높은 담장이라야 사람의 키를 훌쩍 넘지 않으니 쉬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야 맙니다. 뭐, 굳이 감출 것도 없겠지요. 살림이라야 다 고만고만하니 서로 견줄 필요도 없고, 사는 모습 또한 비슷비슷하니 기어이 엿볼 까닭도 없겠지요.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마음이 편안하니 걸음이 팔자로 늘어져도, 여기저기 기웃대다 오지랖이 질척거려도 누구 하나 탓하는 이도, 탓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기선 햇살조차 느리게, 아다지오로 흘러내립니다. 오랜 세월 어느 하나 모난 놈 없이 둥글둥글 박히어든 돌 등을 타고 놀다, 제 어미 가슴보다 더 보드라운 황토이엉 속으로 스미어버립니다.

‘슬로시티(Slow City)’를 아시나요? 모든 것이 빠르게,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린 삶’을 꿈꾸는 곳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자연도, 사람도, 사람의 먹을거리도 급히 서두르기만 하다 보니 체하고, 병들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1999년 ‘슬로푸드 운동’을 펼치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네 곳이 모여 스스로 ‘슬로시티’임을 선언했습니다. 빠른 사회 변화와 반대로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에서 지역 고유문화를 지키며 쾌적한 삶을 누리는 운동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그 후 그 뜻에 따르는 다른 나라의 많은 도시가 동참했고, 슬로시티국제연맹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동안 10개 나라 93개 도시가 가입했는데, 모두 인구 5만 명을 넘지 않고, 대형 마트나 패스트푸드점이 없는 곳입니다. ‘패스트, 패스트’로도 모자라 ‘퀵, 퀵’을 연신 외쳐대는 우리에게는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슬로시티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아시아에서 최초로 말입니다. 담양군 창평면을 비롯해 장흥군 유치면,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등 모두 전라남도의 네 곳입니다. 이로써 슬로시티는 11개 나라 97곳이 되었습니다.

호남고속도로 창평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그 유명한 담양의 대숲이나 메타세콰이어길에 이르기도 전에 작은 안내표지판 하나를 만납니다. ‘안복자 한과’. 그 간판은 이곳 창평이 한과의 고장임을 알리는 장승과도 같습니다. 한과야말로 창평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슬로푸드입니다. 한과 자체가 찹쌀을 물에 불렸다가 발효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스트나 베이킹파우더 같은 걸로 강제 발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곳에서 천천히, 제 스스로 알아서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립니다. 방부제라든지 색소라든지 향이라든지 하는 화학첨가제는 일절 넣지 않습니다. 다만 정성만큼은 듬뿍 부어 넣습니다. 안복자 한과를 비롯한 창평의 한과들은 그 재료로 순수한 우리 농산물만 고집합니다. 그것도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만을요. 안복자 한과에서는 또 대부분의 제품을 미리 만들어놓지 않고 주문을 받고서야 생산과정에 들어갑니다. 그것도 기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통방식 그대로 일일이 수작업으로 말입니다.

한과를 만드는 데는 한 달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쌀을 물에 씻어 10~15℃로 7~10일 정도 발효시킨 뒤 빻아서 가루로 만듭니다. 이 가루에 콩물과 소주를 섞어 반죽하여 가마솥에 찌고, 이를 꽈리가 일어나도록 치댄 후 원하는 크기로 잘라 숙성과정을 거쳐 튀겨냅니다. 이렇게 만든 한과는 두텁고 속이 꽉 차있으면서도 씹는 맛이 부드럽습니다. 어찌 한과뿐이겠습니까.

안복자씨는 1980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광주에서 살았습니다. 80년 광주의 ‘잔인한 봄’은 이 부부라고 비껴가지 않아 신혼의 단꿈을 깨기도 전에 생활 터전을 다 잃고 농사라도 짓고 살려고 남편의 고향인 창평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내 땅 한 뼘 없이 남의 땅을 빌려 짓는 농사로는 근근이 먹고살기도 힘들었습니다. 1999년부터 아이들 교육비라도 보탤 요량으로 한과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부업 삼아 시작했던 일이 입소문을 타면서, 광주에서까지 주문이 밀려들자 아예 농사일을 제쳐두고 2001년 안복자 한과를 설립, 사업의 길로 나섰습니다. 농수산부의 전 제품 전통식품 인증도 받았고 농수산물 가공부문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2005년부터는 미국·유럽·중국 등지에 수출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고생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내력이 고스란히 한과에 스며들어 그 깊은 맛을 이루었습니다.

이번에는 창평읍내 시장통의 고정주씨 엿방을 살짝 엿볼까요? 부뚜막에 걸린 커다란 가마솥 세 개에는 자욱한 수증기를 내뿜으며 연신 엿물이 끓고 있습니다. 엿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간이라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부터 기껏 3월까지뿐인 데다 명절 대목까지 앞두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합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것을 ‘엿장수 맘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겉보리를 깨끗이 씻어 물에 두어 시간 담근 후, 바구니로 건져 촉이 나는 것을 기다렸다 그늘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씻으면서 촉을 조절하고, 쌀은 물에 담갔다가 건져 시루에 얹혀놓고 고두밥을 찌고, 그를 엿질금과 섞어 식혜를 만드는 데 꼬박 아홉 시간, 그 액을 짜서 솥에다 달이면 조청이 되는데, 계속 저어가면서 더 달이면 갱엿이고 그 놈을 잡아 늘이면 흰엿인데(아이고, 숨넘어간다), 말이 쉽지 한 번 시작하면 48시간 잠도 못 자고 지켜 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조차 요즘엔 일손 구하기가 어려우니 주로 밤중에만 일을 하게 됩니다.

창평 쌀엿은 조선시대 양녕대군이 이곳에 내려와 지낼 때 따라온 궁녀들이 그 비법을 전수해준 것으로, 이 지역의 현감들이 궁중에 상납할 선물을 마련하면서 제일 먼저 찾았다 할 만큼 그 유래가 깊고 명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남도의 관혼상제에는 엿이 빠지지 않는 전통이 있으니, 한때 창평에서는 집집마다 엿을 달였다 할 만큼 그 수효가 많았으나, 엿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지금은 11가구로 줄었고, 그나마 세 집은 나이가 들어 일손을 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끈덕진 엿이라 하여도 그 생명력만큼은 엿가락 늘이듯 마음대로 늘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창평장터 한켠에는 국밥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장터에 국밥집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그 국밥 맛이야 별다를 것 있겠습니까마는, 이곳 국밥집들은 장이 서지 않는 날도 항시 붐빕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멀리 광주 사람들도 이곳까지 달려와 허기를 메우고 갑니다. 헛헛한 마음까지 채우고 갑니다. 사실 모든 것이 느리기만 한 창평에서 국밥은 가장 빠르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말하자면 창평의 유일한 ‘패스트푸드’입니다. 그렇지만 국밥의 맛은 사골국물 맛에 좌우되니, 그 또한 삭히고 묵히는 데 이골이 난 창평 사람들이 끓여낸 국밥 맛이 각별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황토방국밥집의 조금례씨는 그 음식만큼은 절대로 ‘조금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마음에 든다 싶으면 뜨끈하고 개운한 국밥만으로는 모자라 암퇘지 내장으로 만든 암뽕순대를 듬뿍 얹어줍니다. 이처럼 징한 정으로 창평 사람들은 설을 맞이하고, 오랜만에 돌아올 객지의 가족들을, 아니 누구든 이웃 같은 모든 손님을 맞이할 준비에 조금은 분주합니다.

유성문의 길

어떻습니까. 이쯤 하면 고향의 정취가 눈앞에 선히 그려지면서 귀향을 앞둔 마음이 부산해지기만 합니까. 아니면 찌들고 느려터진 그 모습이 지긋지긋해 연휴 때 골프채 매고 외국이라도 다녀올 작정이십니까. 아무튼 천천히 가십시오.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인생은 속절없이 빠르기만 합니다.

<글·사진|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