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이름값 못하는 회장 “방 빼”

세계 유명 대기업 거물 CEO들 실적 부진으로 줄줄이 낙마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처럼 수십년간 세계 경제계에 군림하던 최고경영자(CEO)들이 최근 차례로 무너지고 있다.
지난 2월 IT업계의 여제(女帝)로 화제를 몰고 다니던 칼리 피오리나 휴렛팩커드(HP) 회장이 실적부진을 이유로 사실상 쫓겨난 데 이어, 3월 들어서는 월트 디즈니를 21년간 이끌어온 마이클 아이스너와 세계 최대 보험사 AIG를 무려 36년간 지휘했던 모리스 그린버그 회장이 불명예 퇴진했다.

또한 사상 최대 회계부정이 드러나면서 파산했던 미국 통신업체 월드컴의 버나드 에버스 전 CEO는 최근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사기, 허위자료 제출, 위증 등 9가지 혐의로 유죄평결을 받았다. 에버스는 오는 6월로 예정된 최종선고에서 최고 징역 85년까지 선고받을 것으로 보여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유명 CEO들의 퇴진은 지난해 12월 남아시아를 덮쳤던 쓰나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3월 29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회계부정 파문에 휩싸인 AIG 임원 12명을 소환한 데 이어 투자자문사 버그셔 해셔웨이의 자회사 제너럴 리를 상대로 조사에 착수했다. 변칙적인 보험상품 판매로 AIG 실적 부풀리기에 일조했는지 여부가 초점이다. 미 법무부는 금세기 최고 투자전문가이며 세계 두번째 거부인 워렌 버핏 버크셔 해셔웨이 회장을 상대로 오는 4월 11일 면담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사정당국의 칼날에 성역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CEO의 피’를 요구하는 주주들 미국 재취업 전문업체 챌린저 그레이&크리스마스는 지난 2월 한달 동안 미국에서 무려 103개 기업의 CEO가 교체되어 2001년 같은 기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기업실적에 대한 주주들의 태도가 깐깐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적인 예가 3월 24일 전격 해고된 프루덴셜(한국에서는 PCA생명으로 등록)의 조너선 블루머다. 2000년 3월 블루머를 CEO로 앉힌 프루덴셜의 주가는 5년 만에 반 토막이 났다. 블루머는 2003년 배당을 줄여 주주들의 원성을 샀고, 지난해에는 적자투성이인 인터넷 뱅킹 자회사 ‘에그’의 지분을 매각하려다 실패해 22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적자를 초래했다. 프루덴셜 주식을 운용하는 브리태닉 자산운용 펀드매니저 필립 그레이브스는 “블루머의 피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의 정서는 한마디로 ‘돈을 벌지 못하는 CEO는 쓸모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단기적인 재무제표에 관심이 높은 주주들은 많은 배당에 높은 주가를 요구하며 CEO를 압박한다. 일본의 자존심이라고까지 불리며 ‘소니(SONY) 중흥’을 일궈 세계적 CEO 반열에 올랐던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의 ‘10년 권세’를 무너뜨린 요인도 바로 실적이다.

심지어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최고경영자 릭 왜고너 회장도 최근 발표된 부진한 실적 전망에 ‘낙마’ 위기에 처했다. 왜고너는 5년 전 GM의 CEO로 취임했을 때 GM의 미국시장 점유율을 30%, 연평균 매출 증가율을 8%로 끌어올릴 거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도요타 등에 밀려 지난해 시장점유율은 26.7%로 떨어졌고, 지난 3월 16일 발표된 올해 주당 순이익은 예상치의 절반인 1~2달러 수준이었다. 이건 존스 신용평가의 애널리스트 시안 이건은 “아직 왜고너의 자리가 흔들린다는 얘기까지는 들리지 않지만 그가 위기에 빠진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실적압박→회계부정 실적에 대한 주주들과 시장의 유례없는 압박은 엔론, 월드컴, 타이슨푸드(미국 최대 정육업체), AIG 사태에서 엿볼 수 있듯이 CEO의 회계부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기업실적은 하향곡선을 그리는데도 분식회계를 통해 매출이나 이익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주가를 띄우고, 자신은 수백만달러의 스톡옵션 등을 챙기는 편법이 횡행했던 것이다.

특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주가가 폭등하고, 작은 실적 발표에도 시장이 열광했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IT 활황장세는 이러한 회계부정을 알게 모르게 부추긴 측면이 있다. 그러나 IT 거품이 꺼지면서 회계부정의 엄청난 피해가 눈앞에 드러났고 시장은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회계책임자의 독립성과 재무자료 작성에 관한 이사회의 책임을 강화한 ‘서베인스 옥슬리법’이 제정되면서 대기업 CEO들의 책임범위가 크게 늘어났다. ‘자세한 건 몰랐다’는 총수들의 변명이 더 이상 법정에서 통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특히 최근 들어선 비윤리적 행위의 외연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해리 스톤사이퍼 보잉사 회장의 전격 해고 사유가 됐던 여자 임원과의 염문설은 예전 같았으면 ‘윙크 한 번’으로 넘어갈 만한 일이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지적이다. 스톤사이퍼야말로 취임 이후 뛰어난 업무능력을 보이며 추락하던 보잉사를 회생시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어느 유명 컨설팅회사 관계자는 이제 대기업 총수들 주위에는 조명등이 사방에 켜져 있고, 곳곳에 TV 카메라도 설치돼 있다며 숨을 만한 어두운 곳은 더 이상 없다고 비유했다.

스타 CEO 시대 저무나? HP는 3월 30일 칼리 피오리나 전 회장의 후임에 미국 현금지급기 제조업체 NCR의 마크 허드를 임명했다. 피오리나가 할리우드의 특급 스타에 비유된다면 허드는 브로드웨이의 무명배우에 가깝다. 그러나 1980년 NCR에 입사한 허드는 적자에 시달리던 이 회사의 경영을 정상화시켰고 NCR의 지난해 4·4분기 수익은 55%나 급등했다. 일시에 세계적인 조명을 받으며 소니의 수장으로 등극한 CBS 프로듀서 출신 하워드 스트링거 신임 CEO도 전임 노부유키 회장에 비하면 무명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드리포트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최고경영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앞으로 CEO를 선택하는 데는 명성보다 검증된 실력이나 한층 엄격해진 도덕기준이 적용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어 AIG의 그린버그 회장은 과거 거의 40년간이나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긴 했지만 그런 사람은 앞으로 흔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부/이상연기자 lsy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