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네. 제설린은 자신의 이런 생각에 놀랐다. 유지니처럼 곱게 애지중지 자라 수줍음 많은 여자에겐 끌려본 적 없었다. 그녀는 보통 자신처럼, 스스로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그걸 얻고자 결단을 내리는 여자들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눈부신 존재를 바라본 제설린은 꽃을 들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이기적 목적 대신 구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폐수엔진>이 실린 N. K. 제미신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표지
남성가부장제 문학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문장들이 야기하는 불협화음(?)에 불편해할 공산이 크다. 아이티공화국에서 미국 뉴올리언스에 잠입한 산업스파이 제설린도, 그리고 거기서 만난 재간 좋은 과학영재 유지니도 둘 다 여성이니까. 하나 유지니에 대한 제설린의 태도는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애정 어린 시선과 하등 다르지 않다.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휴고상을 받은 흑인 여성작가 N. K. 제미신의 단편 <폐수엔진>은 스팀펑크와 대체역사가 혼재된 시대를 배경으로 흑인이자 여성이란 이중차별을 떨쳐내는 두 여인의 러브스토리다.
이 소설은 미국에 이어 아메리카대륙에서 독립한 두 번째 나라라는 영예에 걸맞지 않게 2세기가 넘도록 아프리카보다 못한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는 아이티공화국의 흑인 백성들이 프랑스와 미국의 숱한 경제침탈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써는 최첨단이라 할 비행선을 비롯한 과학기술 혁신에 성공하여 주권을 지켜내는 허구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체역사이며,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 없는 아이티에서 유력한 산업에너지원으로 부각된 메탄가스 기반의 폐수엔진 개발 노하우 선점을 둘러싸고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과 갓 독립한 약소국 간의 첩보전을 그린다는 점에서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긴다. 메탄가스로 작동되는 비행선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런 배경보다 한층 더 눈여겨볼 포인트는 흑인여성이 처한 이중의 딜레마다. 제설린은 흑인여성이라도 해방된 아이티에서 원하는 일을 추구하며 성적으로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아간다. 반면 유지니는 미국사회에서 형식상 자유민이되 크리올인(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라 신분이 어정쩡하며, 여성이라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지녔어도 관련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오빠로부터 과학을 어깨너머로 배운다. 조애너 러스의 유명장편 <여성인간>과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에서 보듯, 페미니즘 SF는 작가가 이상화한 여성(어떤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된)과 현실의 굴레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여성을 대비시키는 플롯을 즐겨 쓴다.
<폐수엔진>에서 백인들은 아무리 매끈한 용모를 지닌들 뼛속까지 인종차별적이며 KKK를 연상시키는 하얀동백단이 전형적이다. 한편 흑인여성 주인공은 능력 있는 백인남성의 정부가 되는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또 다른 흑인여성에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이 같은 해피엔딩은 여성이 여성을 책임지는 대안가족, 그리고 그러한 가족들이 용인되는 대안사회를 상정한다. 그렇다. 두 여인의 사랑은 근대유럽의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들처럼 여성들의 플라토닉 러브에 조심스레 안주하는 대신 육체적 사랑은 물론이고 법적 경제적으로 실효성 있는 가정을 구성하는 데로까지 나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폐수엔진>은 가치전복적이다. 그런데 SF의 본질이 원래 가치전복적이지 않던가. 다만 기존 인간세상을 뒤엎는 요소에는 단지 첨단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에 다다르도록 우리의 금기를 깨려는 시도 또한 포함됨을 이 단편소설은 보여준다. 작가의 전개와 결말에 얼마나 동의할지는 독자 개인의 몫이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SF라는 문학 형식은 이런 식의 사고실험을 언제나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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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