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60) 아직도 야단치시는 마음속의 어머니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 남자의 친절한 도움과 거절 못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뜻밖의 하룻밤을 보냈다. 그 일은 그녀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요즘 같았으면 하룻밤의 부적절한 사건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구구구구.”

부스럭거리는 과자봉지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와 손놀림에 따라 한 떼의 비둘기가 발아래로 몰려든다. “이 녀석들 내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다른 사람이 주면 또 먹고, 아무도 안 주면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먹으니 참 똑똑하지 않아요?” 혼잣말인지 나를 의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연신 과자를 던져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자기만족일지도 모른다는 내 마음을 아는지 “그만 주는 게 좋겠죠? 진짜 얘네들한테 좋은 걸 줘야지 사람들이 좋다고 자꾸 주면 안 되죠. 예뻐서 주긴 주지만….” 힐끗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나는 한순간 가졌던 그녀에 대한 힐책이 미안했는지 그만 그녀의 벤치 끝에 슬며시 걸터앉았다. “이 녀석들 지금은 내 곁에 있지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먹을 것 주면 그리로 다 가요. 제 멋대로 구는 배신자예요.” 상황에 걸맞지 않게 다소 진지하다.

서울역 광장에서 한 노인이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나눠주고 있다./이석우 기자

어머니 말씀이 전부였던 순진했던 딸

그녀의 철 지난 옷차림과 달리 목소리와 자세엔 어딘지 모를 고상함이 배어 있다고 생각할 때쯤 자신이 한때는 정신병원 신세도 졌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다며 처음 보는 내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더군다나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얘기를 하다 서로 같은 지역인 걸 알았고 출신 중·고·대학까지 알고 나니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저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이 주시는 것만 받아먹었어요. 집과 학교만 오가며 특히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하라는 공부만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유난히 부모님 말씀이 전부였고 그렇게 따르는 것이 잘하는 줄 알고 어머니가 하라는 것만 했죠.” 나는 내 또래의 그녀에게 처음과 달리 다소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땐 대개 그랬죠. 그래서 좀 후회되는 게 있나 봐요?”

“그럼요. 저런 비둘기 새끼들도 다 아는 사실을 저만 모르고 살았으니 정말 멍청한 거죠.”

“뭐가 지금까지 후회되세요?” ‘멍청했다’는 말이 내 마음에 훅 밀려온다.

“부모님은 제게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나름대로는 풍족히 주신 것 같아요. 다만 가족을 떠나서는 제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질 못했던 거죠. 한마디로 세상살이가 서툴렀죠.”
“그럼 정말 난감하고 속상했겠어요.”

“어머니가 계실 때까진 그래도 견딜 만했는데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쪽을 바라보며 하는 얘기들의 주제가 점점 무겁게 느껴질 때쯤 나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슬며시 일어나려 엉거주춤했다.

“가시려고요? 왜 사람들은 제 얘기만 하면 다 바쁘다며 가는지 몰라요. 예전에 나를 치료하던 의사도 그랬고 가족들도 그러고…. 그런데 여기 와서 비둘기한테 과자 주면 절대 안 떠나요.”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마음속에서 미안함과 애잔함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비온 후의 상쾌한 공기를 핑계대며 다소 여유 있는 척 그냥 눌러앉고 말았다. “그래요. 날씨도 좋은데 조금 더 있다 가죠, 뭐.” 미안한 마음에 선심 쓰듯이 말했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형제자매들 역시 훌륭한 교육을 받아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단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녀는 약간 정신적 장애가 있어 아직까지 독신이란다. 지역 도서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책도 많이 볼 수 있어 좋단다. 병은 오래전에 생겼다.

대학 졸업 후 어머니 부재의 허전함을 달래고자 한 친구와 가까워졌고 그 친구를 통해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나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 친구 덕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도 처음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다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그녀의 인생은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일을 배워서 스스로 경제활동을 해보고 싶었고,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뜻 손을 내민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 남자의 친절한 도움과 거절 못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뜻밖의 하룻밤을 보냈다. 그 일은 그녀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요즘 같았으면 하룻밤의 부적절한 사건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 후유증은 당시 그녀에겐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평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당부

“제가 바보였어요. 누구를 탓하겠어요? 정신 똑바로 못 차린 제 잘못이죠.”

“다 본인 잘못같이 느껴지시나 봐요.”

“부모님은 저를 그렇게 철저하게 교육시켰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하찮은 친절에 그냥 넘어간 거잖아요. 정말 기가 막히죠.”

“지나고 보면 젊은 시절 실수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그 당시 저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죠. 상대는 물론 진지하게 생각지도 않으며 그저 하룻밤 즐긴 것뿐인데…, 거기에 속은 멍청한 저는 살 가치가 없었던 거지요.”

그 후 그녀는 몇십 년간 무덤 같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어머니 자리에 우뚝 서서 마치 무능한 자식을 처벌하듯 자신을 매일 처벌하며 지내온 것이다. 평소 어머니는 등교하는 딸을 붙잡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절대 싸우지 말라”는 말을 매일 아침마다 당부했단다. 그날도 그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선생님처럼 그에게서 일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고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거절은 곧 싸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그 당시 20대 당신이 지금 당신 앞에 있다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으세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하지요!”

“그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잖아요.”

“네. 어머니가 늘 제게 했던 말이죠. 맞는 말이잖아요.”

“그 일이 있던 당시에도 당신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지 않았나요?”

“…….”

긴 침묵이 흐르며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이제야 얄궂은 비둘기들의 행동을 불평하던 그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도 사실 비둘기처럼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싶었나 보다.

얼마 후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뗀다.

“그놈이 정말 나쁜 놈이었어. 네가 말 잘 듣는 순진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못되게 군 거야. 그 일로 우리 가족을, 특히 우리 아버지를 협박한 정말 비열한 놈이라고. 괜찮아.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네 잘못 아니야. 넌 착한 아이였어.” 그녀의 목소린 점점 커졌고 두 팔은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흐느낀다. 마치 어머니가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주듯 그녀의 두 손은 온몸과 팔 다리를 쓸고 또 쓸어내린다. 마침내 그녀를 휘감고 있던 오랜 굴레를 벗어 버린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참 오랫동안 엄마를 붙잡고 살았네요. 여태껏 그 순진하고 가엾은 애를 엄마처럼 힐책하고 있었으니….”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아이처럼 눈물을 훔친다. “나도 쟤네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살고 싶네요.” 비둘기 떼를 보며 그녀가 미소 짓는다. 나 역시 웃으며 그녀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