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바라카몬>-혼자이고 싶지만 도저히 혼자일 수 없는

뭐든지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처럼 그럴 수가 없네.” 이런 깨달음을 이어나가며 한다는 마을의 글씨 쓰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글씨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글씨 쓰기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한다 세이슈는 23세의 나이에 한창 주목받던 도쿄의 서예가였다. 그러나 기본이 충실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글씨를 두고 “견본 같은”, “판에 박힌”, “지루한” 글씨라고 평한 서예관장에게 폭력을 행사해버리고 만다. 그 길로 반자발적으로 떠난 유배지, 그곳이 도쿄에서 1000㎞ 떨어진 섬마을 나나츠타케였다.

현재 14권까지 발행된 <바라카몬>(요시노 사츠키, 대원씨아이)은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다. 서울(도시/수도) 청년이 시골에서 살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죽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맥락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랐다.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의 맥락은 지역 캐릭터 사업 등 지방자치의 문화적 활성화와 궤를 함께하는, 지방을 긍정적으로 낭만화하는 경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도쿄를 적잖이 염세적으로,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도 맞물려 있다. <은수저>, <아이사와 리쿠> 등과 함께 도시/지역이라는 공간적 배치에 대한 지금의 시각을 흥미롭게 담고 있는 작품이 <바라카몬>이다.

요시노 사츠키 작가의 만화 「바라카몬」에서 한다가 나나츠타케 마을과 만난 후로 글씨를 쓴 장면. 그가 직접 만난 사물과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 대원씨아이

자연 속에서 어울려 노는 것의 즐거움

그 시각은 역시 나고 자란 사람의 인물됨을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아이사와 리쿠>는 감정을 숨기고 가짜 눈물을 흘리는 도쿄 청소년 아이사와 리쿠를 통해 도쿄를, 리쿠가 한동안 살게 된 간사이 지방 여러 인물의 천진난만한 솔직함을 통해 간사이의 이미지를 주조한다. <은수저>는 도쿄 학교의 경쟁을 피해 도망친 주인공과 주체적으로 가업을 이어가는 지방 학생들의 만남을 통해 각각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세부적인 결은 더 다양하며 쉽게 일반화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으나, 대체로 도쿄를 낮추고 지방을 높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늘 주인공은 도쿄 사람이고, 지방은 아직 불완전한 도쿄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로 배치되기 일쑤라는 점에서 지방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해석도 이어져 왔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끼>나 <산송장>, <악의는 없다>와 같이 지방을 비과학적·비이성적이며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배치하는 같은 기간 한국 웹툰의 방식보다는 지방의 이미지를 다소 일의적이나마 사려 깊게 그리고 있다고 이해된다. 보지 못하던 것을 이왕 보여준다면, 긍정적인 이미지로 시작하는 편이 서울의 독자에게 더 좋은 만남의 출발이지 않겠는가. <바라카몬>은 그 계열의 최종판이라고 해도 될 만큼 ‘긍정적’ 지방의 모습을 다채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나나츠타케촌에서 독자들이 한다와 더불어 만나게 되는 마을사람들의 수는 대략 30명 안팎이다. 그 중 주요 인물을 소개하면 이렇다. <요츠바랑>의 요츠바 못지않은 마성의 어린이 히로인 나루. 천진난만하고 곤충 등 자연에 친숙하며 어른스러운 명대사를 생각 없이 내뱉는 경우가 있다. 나루의 단짝 히나는 곤충에는 조금 약한 편이고, 전략적으로 울 수 있는 귀엽게 약은 어린이다. 아이사와 리쿠의 귀여운 버전이랄까. 중학생으로 올라가면 만화가 지망생 후죠시(腐女子·글자 그대로는 ‘썩은 여자’라는 의미로 BL 장르 등의 동인지 문학을 즐기는 여성형 오타쿠를 자타칭으로 일컫는 말)인 타마와 ‘체육계’ 왈가닥 미와가 있다. 마을의 거의 유일한 고등학생 히로시는 머리색을 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요리사 지망생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채로움 가운데도 발견되는 몇 가지 지방만의 특색이 있는데, 그것은 도쿄 출신 주인공 한다와의 대비에서 먼저 파악된다. 한다는 기본적으로 놀 줄 모른다. 도쿄 시절부터 서예대전 출품에 맞춰 늘 글씨를 써왔으며, 또 지금은 글씨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노는 데 능하다. 공부에 지친 도시 어린이에 대한 대비인 양, 어린이들이 자연과 함께 노는 모습이 특히 풍성하다. 이곳에서 한다는 자연 속에서 어울려 노는 것의 즐거움을 배운다. 놀이를 통해 삶을 깨닫고 그것이 한다의 “견본 같은”, “판에 박힌”, “지루한” 글씨를 바꾼다. “섬에 있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글씨”가 탄생하는 것이다.

한편, 한다는 인간관계에 서툰 반면 혼자서는 생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일 수 없는 한다는 식사를 비롯한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타인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이곳 시골에서 깨닫는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하다. 개개의 인물됨은 다르나 서로의 특색과 장기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데 능한 마을사람들은 그야말로 상부상조하는 오지랖을 자연적으로 발휘하여 한다를 즐겁게 괴롭힌다.

「바라카몬」한국어판 1권의 표지. / 대원씨아이

이처럼 노는 법과 함께 사는 법의 학교로 형상화된 지방의 이미지는 서울적인 것과의 대비와 함께 그곳만의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통해 실체를 획득해 나가며 의미를 구성한다. 그 의미는 특히 서예가 한다에게 있어 지시 대상(기의)과 지시하는 말(기표)의 끈끈한 결합이다. 이름 뒤에 사람이 있고 사물의 이름 아래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 있다는 것을 한다는 직접 마주치며 알아나간다. 하지만 독자는 작품 속에서 만날 뿐, 한다처럼 지방의 삶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이와 한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배운 것이 이것이었으므로.

지방을 그린 작품이 지니는 중요성

민물가재 낚시를 왔던 사람들이 개울에 버려두고 간 쓰레기를 보며 한다와 마을 선생님은 표어를 고민한다. 무단 주차된 자전거가 ‘자전거 자유롭게 가져 가세요’라는 팻말 덕에 사라졌던 예처럼 설득력 있는 말을 고안해 내려는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당신이 버린 쓰레기 때문에 지구는 이제 끝장입니다.” / “스케일이 너무 커서 현실감이 떨어져요.” / “쓰레기를 버리지 마라. 너는 쓰레기.” / “너무 가벼워. 염장만 지르잖아요.”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 나루가 입간판에 쓰는 표어가 인상적이다. “쓰레기를 버리면 민물가재가 사라집니다.”

이 말은 민물가재를 일상적으로 경험한 나루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민물가재를 낚으려 찾아온 낚시꾼들에게도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만큼 의미를 지니게 되는 말이다. 표어로 안성맞춤인 이 말은 그러나 내게는 다소 현실감이 부족했다. 민물가재를 직접 경험한 일이 거의 없는 내게는 마치 지구가 끝장이라는 말 정도로밖에 와닿지 않았다. ‘민물가재가 사라진들 내게 뭐가 문제인가’라는 이기적이고 심드렁한 태도가 내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니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의 설득력 이전에 그 말의 존재의 근원인 사물에 대한 체감이, 그 감각이 또한 중하다는 것을.

만화로 본 세상

<바라카몬>과 같은 지방을 그린 작품이 지니는 중요성과 한계는 이 맥락에서 완연히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여성, 성적소수자, 빈민, 비정규직, 환자, 노인, 군인 등 이 시대에 소외된 여러 형상들을 그리는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가 생각지 못한 기의들을 작품 속 기표를 통해서나마 이어주는 이야기들은 중하다. 하지만 실체와 이어지는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이야기 속의 기표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만남을 예비하는 것으로 의미를 지니되 직접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계는 반쪽으로 남는다. 한다가 그랬듯 세계를 직접 만나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텍스트의 재현을 문제 삼는 것으로 평론이 끝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결국 남는 것은 독자라는 이름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