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서둔야학교 교장선생님… 황건식 정열과 사랑으로 가난과 무지와 맞선 교육자

요즘 학교에서 재학생이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조차 김영란법에 저촉된다고 한다. 교육부는 모든 카네이션을 금지했다가 반발이 심하자 학생 대표가 공개적으로 꽂아드리는 카네이션만 허용했다고 한다. 여러 모로 씁쓸한 세태다.

스승의 날 다음날인 5월 16일 경기 수원시 옛 서울농대 후문 쪽에 있는 허름한 건물을 황건식 인천음악문화원장(73)과 평택여고 교사를 지낸 박애란씨(66)가 찾았다. 대지 50평에 건평은 한 10여평이나 될까. 잡초가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고, 실내는 맨 콘크리트 바닥에 천장도 훤히 드러나 있다. 이곳을 둘러보는 두 사람의 표정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건물 한쪽에 ‘우리들의 꿈터 서둔야학교’라고 쓰인 새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서둔야학교 교장선생님… 황건식 정열과 사랑으로 가난과 무지와 맞선 교육자

심훈의 <상록수> 지역적 배경이 된 곳

서둔야학은 2000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이 건물 입구에 세운 ‘서둔야학 유적지’ 안내판에 역사가 요약돼 있다. 이 안내판에는 “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 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1965년 당시 학생이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이곳 부지를 구입해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야학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날 이곳을 찾은 황 원장은 바로 이 서둔야학의 교장선생님, 박씨는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이었다. 박씨는 주변의 들꽃을 꺾어 작은 꽃송이를 만들어 황 원장의 웃옷에 꽂아주었다. 매우 훌륭한 카네이션이다.

농학과 63학번인 황 원장은 학생들로부터 교장선생님이라 불린다.(이후 기사는 교장선생님으로 표시한다) 황 교장선생님은 “당시는 주임선생님으로 불렸는데, 나중에 후배들이 초대 교장선생님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후배 강석찬 선생(76학번·화성한과 대표)은 “황 교장선생님이 서둔야학의 실제적 대부이자 역사적 증거”라고 소개했다.

서둔야학은 1954년 2월 김용준 장로가 세운 서둔교회에서 시작한다. 김 장로의 아들 김성원씨(후에 건국대 학장 역임)가 서울농대에 입학해 교회에 야학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 농대생들의 야학은 이보다 훨씬 과거로 소급된다. <서둔야학사>에는 1926년 김성원, 김찬도 등이 이곳 수원 서둔리에 설립한 야학을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다.

황 교장선생님은 “심훈의 <상록수>의 지역적 배경이 바로 이곳으로, 당시 몇 명 안된 수원고등농림 한국인 학생들이 일제가 말살하려던 우리의 말과 역사, 문화를 가르쳤던 것이 야학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실제 1930년대 농촌 계몽소설로 유명한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박동혁이 다니던 학교가 바로 수원고등농림학교, 즉 현 서울대 농대의 전신이다.

“야학을 시작했을 때는 공부를 할 교실이 없어 양계장, 잠사(누에)실, 목장사택 등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공부를 했다. 책걸상도 없이 가마니 깔고 앉아 호롱불 켜고 했다. 시설이 너무 열악해 선생님들(대학생들)이 모금해 교사를 짓기로 했다. 시멘트를 사다 직접 벽돌을 찍어 소달구지로 나르고, 나무는 학장을 졸라 농대연습림에 있는 나무를 베어 시내 제재소에서 잘라 썼다. 처음에는 8만원이면 교사를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지만 23만원 들었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1만원 정도였다.”

1965년 당시 국어수업 모습과 야학의 역사를 정리한 「서둔야학사」. / 서둔야학사

군사정권 시절 야학 금지로 위기 맞아

<서둔야학사>를 보면 당시 선생님과 학생들이 직접 건물 기초를 만들고 벽돌을 찍어 쌓는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교실 대들보에는 당시 학교를 지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신축교사는 페인트칠조차 못했지만 낙성식에는 당시 국회의원과 농대교수, 마을 어른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교훈은 ‘참을 사랑하자’ ‘시처럼 음악처럼 살자’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사랑하자’였다. 시처럼 음악처럼 살자는 교훈은 음악을 좋아했던 황 교장선생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서둔야학은 ‘으뜸상’ ‘애씀상’ ‘더 잘함상’ 등 순수 우리말로 된 상장을 만들었다. 황 교장선생님은 ‘펼쳐진 서둔벌 바라보면서 땀 흘려 일해가는 푸른- 정신을 …어린 우리 배움은 끝이 없구나…’로 이어지는 교가를 직접 작사했다. 그는 “군대시절 작사한 글에 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님(정진곤)을 졸라 무료로 곡을 받았다”고 말했다.

교실을 마련한 학교는 본격적으로 중학과정인 고입자격 검정고시반을 모집했다. 이를 정규 1기로 치는데, 바로 이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인근 딸기밭에서 일하던 박애란 소녀가 입학했다. 서울대 농대 후문 인근에는 딸기밭이 많았고, 이곳에서는 60~70년대 유행했던 대학생들의 ‘딸기밭 미팅’이 주로 벌어졌다. 1965년 입학한 소녀 박애란은 서둔야학 출신 최초의 검정고시 합격생이다.

박씨는 “나도 저 딸기를 사먹을 수 있을까, 나도 ‘대학에 진학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면서 “야학에서는 꼭 검정고시 과목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음악·문학·역사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열아홉에 검정고시에 합격해 스무 살에 고등학교에 진학, 방송통신대학교(국문과·가정과)를 거쳐 1979년 스물여덟 살에 ‘꿈에 그리던’ 교사자격증을 땄다. 첫 교직은 경기도 시흥에 있는 야간반 고3 담임이었다. 그때 소감을 그는 “내 제자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라고 회고했다. 그는 평택여고를 끝으로 31년간 제자를 키웠다.

서둔야학은 1966년 서울대가 주는 상록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던 서둔야학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며 위기를 맞았다. 5월 17일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리고 7월 30일 과외금지법에 따라 야학도 금지됐다. 선생님(대학생)들이 연행·구속되고, 이념서클(동아리)로 학도호국단 등록이 어려웠다. 결국 황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배·후배들의 난상토론 끝에 폐교를 결정했다.

그는 “학교는 검정고시 공부뿐만 아니라 늘 ‘노예처럼 지배받지 말라’ ‘돈이 없다고 천대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면서 “후배 선생님들이 잡혀가는 상황에서 야학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서둔야학은 1980년 11월 9일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81년 일부 대학원생들이 다시 학생을 모집해 야학을 재개했지만 1983년 부득이 야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서둔야학을 거쳐간 학생은 근 1000명 가까이 된다. 학생 중에는 현재 협성신학대 서명수 학장을 비롯해 현 시립도서관장, 여고 선생님 등 많다. 황 교장선생님은 “착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양순이, 정욱이, 여기 애란이의 언니도 생각난다”고 당시 제자들을 회고했다. 선생님도 200~300명이나 된다.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것은 보통 대학에 입학한 1학년 1년간 교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선생님 중에는 학계로 진출한 사람이 많아 전국의 농대·수의대를 ‘서둔야학 선생님’이 장악하기도 했다.

서둔야학 제자 박애란씨가 황건식 교장선생님에게 들풀로 만든 꽃을 꽂아드리고 있다.

거쳐간 학생은 1000여명, 선생님도 수백명

1983년 서둔야학은 끝났지만 졸업생과 선생님들은 ‘서둔야학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끈끈한 정을 이어오고 있다. 황 교장선생님은 매달 모임을 주선하고 1993년에는 <서둔>이라는 회보까지 만들어 친목을 다졌다. 황 교장선생님은 “대학 때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이후 삶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박씨도 “야학에서 얻은 정은 육신의 정보다 훨씬 깊다”고 말했다.

서둔야학회는 2000년 3월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한 <서둔야학사>를 발간했다. 이 <서둔야학사>는 우리나라 근대 야학사의 중요한 자료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의해 전자도서화돼 있을 정도다. 당시 편찬위원장을 맡은 황 교장선생님은 “서둔야학이라는 공동체는 피 끓는 정열을 가지고 가난과 무지와 맞서 젊은 날의 하루하루를 아낌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과 봉사의 한울이었다”고 정의했다. 또 당시 학생들이 배운 교사는 ‘서둔야학유적지’라는 안내판과 함께 그대로 보존돼 있다. 2015년에는 많은 선생과 제자가 옛 교사를 찾는 대대적인 홈커밍데이를 열기도 했다.

황 교장선생님은 농학과를 졸업했지만 특이하게 음악계로 진로를 바꿨다. 개인적으로 성악을 배우던 그는 이탈리아로 떠나 본격적으로 성악공부를 했다. 그는 움베르토 보르소와 성악가 조수미를 지도한 발렌티니 등 당대 최고의 선생에게 성악을 배웠다. 귀국 후 촉망받는 테너로 많은 작품을 공연했고, 인천오페라단·인천오케스트라 등을 설립하는 등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2014년에 고희콘서트, 지난해에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가질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 인천음악원 원장, 인천오페라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요즘은 충남 서산에서 숲을 가꾸는 데 더 열중하고 있다. 풍류와 무용을 즐기는 언덕이라는 뜻의 소무원(韶舞園) 원장으로 숲속에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원대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황 교장선생님은 “요즘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 사제지간의 정이 남아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선생님들은 적당히 월급이나 받는 월급쟁이로 전락했다, 선생님들에게 페스탈로치의 순수한 교육 본질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제자이자 31년간 정식교직에 있던 박씨도 “서둔야학에는 교사자격증 있는 선생님은 한 분도 없었지만 모든 선생님이 신이 주신 사랑이라는 자격증을 가졌다”면서 “사랑보다 숭고한 선생님 자격증은 없다”고 말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