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사극의 형식을 빌린 현실풍자

/ ㈜영화사조은

제목 왕을 참하라

감독 김재수

출연 강연정, 강윤, 추석영, 김학철

개봉 2017년 3월 16일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대학원 시절, 조선시대 세워진 ‘열녀문’을 어떻게 해석할까를 두고 사회사를 전공한 학생들끼리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권력이 강요한 도덕은 실제 지역사회의 작동원리였을까. 뒤집어놓고 열녀문까지 만들어 유교이념을 설파하려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이상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유교적 지배질서가 실제 지역사회에서는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 <왕을 참하라!>를 보는 기분은 묘했다. 타임머신을 탄 듯했다. 그리 먼 옛날은 아니고 한 30년쯤? 분명 배우들은 요즘 젊은 배우들이다. 그런데 연출은 1980년대 중반 스타일이다. 당시 동시상영관에서 상영되던 영화들을 보던 기억이 난다. 심드렁하게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에로 장면이 나오면 일순 숨죽이며 정적에 휩싸인다. 잠깐이나마 노출되는 비밀스러운 신체의 일부-기껏해야 여성의 가슴 정도였다-를 보기 위한 몰입. 이런 연출을 거의 30년 넘어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묘했다는 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영화를 보는 어떤 시각을 떠올리게 됐다는 것이다. 사극 장르 영화를 볼 땐 항상 되새김질했던 것은 그 영화가 얼마나 고증에 충실했느냐는 점이었다. 영화는 성종 때 발생한 한 유명 스캔들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바로 어우동 사건이다. 영화는 어우동(한자 표기에 따라 어을우동)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비설’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영화의 시작 장면. 정치적 목적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사주단자 앞에서 울고 있는 처녀를 보호해주겠다는 남성이 겁탈한다. 이 남자가 성종, 이혈이다. 이어 붙어 있는 것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장면이다. 할머니가 불러주는 내용조차 제대로 읊지 못하는 남자. 역시 성종이다.

영화는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영웅 또는 계몽군주로 미화돼온 ‘성종’을 정반대로 해석한다. 거세공포로 인한 강박불안이 지배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위해 초콜릿 복근을 단련하고, 아침저녁으로 자기계발 수양에 힘쓰는’ 성종을 묘사한 영화 <역린>(이재규 감독·2014)은 이 영화의 대척점에 서 있다.

터치스크린

성종이 학동시절 어우동을 강간했고,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서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다. 한참 영화를 보면서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가 이 영화에 핍진성이나 고증 따위의 프레임을 적용시켜선 안 된다고 깨달았다. 결국 사극의 형식을 빌린 현실풍자였다. 모화관의 기생언니가 ‘조남충’을 조소하는 건, 최근 2~3년 사이에 온라인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나온 조어인 ‘한남충’을 직설적으로 풍자한 것이었다. 영화는 끝내 교수형을 당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왕을 참하라!’고 소리치는 비설을 통해 여성 해방을 논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여성주의 또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보긴 어렵다. 감독이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감독의 입장이 투여돼 있는 캐릭터는 성종 이혁의 형 이정(월산대군)이다. 여성주의 비평가라면 아마도 ‘더러운 잠’ 논란을 떠올릴 것 같다. 작가는 마네의 그림 패러디를 통해 권력비판을 하고자 했다고 주장했지만,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그것이 패러디라면 게으른 패러디이며 작가가 마네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은 여성의 벗은 몸일 뿐’이라는 반박을 불러왔다. 한명회로 대표되는 당시 사대부 세력의 타락에 맞서 몽화관을 중심으로 대항권력 또는 평등세상의 묘사는 전형적이고 형해화돼 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이 영화는 허구적 정사와 실제적 야사를 외재적으로 표현했음을 밝힌다’는 자막이 덧붙여져 있는데, 차라리 영화 시작 전에 이 자막을 넣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