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바꾸려 해봤자 소용없다?

정치 포르노그라피의 연속 상영이 자칫 ‘무용 명제’를 현실에서 강화함으로써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꼴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때인 것이다.

잠시 미국의 한적한 대학도시에 머문 적이 있었다. 내 또래 세대가 그렇듯, 배낭여행이니 하는 것들은 꿈도 꾸기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고, 교수 사회에서는 아주 흔한 유학생활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한국 사회를 준거로 삼아 어설픈 문화평론가처럼 이런저런 비평을 해대곤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은행이건 카센터건 간에 나를 고객으로 맞이하는 사람들의 업무 처리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는 점이었다. 직장 때문에 한때 지냈던 지방 소도시에서도 창구에 앉아 있는 은행원들은 아주 능숙하게 여러 가지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곤 했다. 그러나 꽤 좋다는 대학들이 몇 개나 모여 있는 미국 동부의 작은 도시에서 만난 은행원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돈도 제대로 세지 못하는 수준이 아닌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유학생 후배들을 모아 놓고 한국의 서비스업 생산성은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무려 1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어느 경제학자의 칼럼을 읽다가 문득 뒤늦은 깨달음을 얻게 됐다. 생산성이 뛰어난 노동자들은 이를테면 월스트리트 같은 곳에 가 있고 내가 만난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은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막상 그런 주장을 읽으니 정체 모를 반감이 불쑥 튀어나오긴 했다. 그럼 누구는 뉴욕에서 화려하게 살고 누구는 시골에서 돈이나 세란 말인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평화로운 소도시 은행, 혹은 카센터에서 필요한 것은 엄청난 토익점수(!)와 해박한 금융상품 지식으로 무장한, 이른바 고숙련 노동자라기보다는 지역 사정에 익숙하며 나쁜 짓 하지 않는 성실한 생활인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충분조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런 노동력이리라. 탁월한 학습능력과 막강한 인적 자본을 자랑하는 법조인, 의사, 교수, 전문경영인들이 얼마나 저열한 수준의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는지는 몇 달째 언론을 통해 낱낱이 알려지고 있지 않은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세대 간 착취현상 나타나

가치판단을 배제한 냉철한 경제학자인 척 말해 보자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높은 생산성을 갖춘 노동력이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나쁜 것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세대 간 착취현상 비슷한 것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지방국립대학생들만 해도 가지고 있는 이른바 인적 자본의 수준은 불과 10여년 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어려서부터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입시경쟁을 거쳐 왔고, 어학공부에 온갖 자격증, 프리젠테이션 스킬 등을 쌓아 왔지만 막상 확실하게 일자리를 얻는 방법이라곤 옳건 그르건 시험으로 결정되는 ‘순수 능력주의’의 장을 통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급공무원 시험에서부터 공기업, 심지어는 로스쿨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가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그야말로 탁월한 성적을 거둔 고교생들은 아예 열아홉 나이에 점수 순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의과대학 정원을 다 채운 뒤에 상당수는 어쩔 수 없이 공학이나 자연과학을 선택한다. 굳이 남 얘기할 필요도 없겠다. 책 한 자 안 보고 논문 하나 제대로 안 쓰며 온갖 프로젝트에 푸닥거리나 일삼는 정규직 교수들 밑에서 시간강사니 강의전담교수니 하는 이름의 젊은 영혼들은 신음한다. 그러하니 패기가 없다거나 꿈과 도전정신을 갖고 해외로 나가라거나 하는 판에 박힌 조언은 이미 충고의 수준을 넘어 협박으로 들릴 지경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벌체제가 단지 한국경제론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추상적 특성을 넘어서서 일상적 위협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갖 시험과 승진, 생존경쟁을 뚫고 대기업 간부가 된 이들이 술에 취해 저잣거리에서 난동 부리는 오너의 젊은 아들을 수습하기 위해 새벽잠을 설쳐야 하는 곳이 한국의 ‘글로벌 기업’이다. 그러하니 ‘생산성이 높은’ 인재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기업에 들어가는 것만은 피하려 할 것이고,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의 ‘생산성’을 갖춘 이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이미 망가져 있는 시스템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젊은 세대에게 절망만 안겨주는 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다

앨버트 허시먼은 국내에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로 번역된 <반동의 수사학>이라는 책에서 기득권이 내세우는 담론전략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그 중의 하나가 이른바 무용 명제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바꾸려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이것은 집합적 행동의 불가능성이라는 고전적 명제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단단하게 굳어져만 가는 시스템 속에서 개별 행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나 혼자 시스템을 바꾸려 해봤자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저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내 처지를 최적화하는 방법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행위자가 이렇게 행동하므로 결국 세상은 또 그렇게 굴러간다.

비상식의 사회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의 계절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국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금 “바꾸려 해봤자 소용없다”는 수사학이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려 들 것이다. 사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대립은 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위해 매우 소중한 것임에도 한편으로는 결국 기득권 안에서 주고받는 액세서리 같은 측면을 지니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 절망만을 안겨주는 사회는 그 자체로 지속불가능하다. 한 방에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재벌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법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다. 청년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이 혁명적 발상처럼 보여도 각종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새는 돈과 그 집행과정에서 서푼짜리 권력을 누리려는 욕망을 억제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합리한 국가권력에 대한 반감과 공공부문의 사회적 역할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일단 공공부문에서부터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정치 포르노그라피의 연속 상영이 자칫 무용 명제를 현실에서 강화함으로써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꼴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때인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추상적 성장전략 보고서가 무용한 까닭이기도 하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