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촛불 다음에는 어떤 세상이 올까

6월 항쟁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반년 뒤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노태우 정부를 만들어주었던 악몽을 기억하기에 미완의 촛불혁명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2016년을 밝혔던 촛불은 새해 들어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촛불이 추운 겨울마저도 이겨낸 것은 거기에 담긴 마음들이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국민에게 모멸감을 안겨준 대통령에 대한 탄핵,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염원이 촛불민심에는 담겨 있었다. 촛불의 광장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넘치고 있다. 그리고 언론들이 쏟아내는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이다. 신년 여론조사들의 대부분은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결과들을 내놓았고, 민주당은 새해의 키워드로 ‘겸손’을 내걸 정도로 표정 관리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회는 이 기회에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책무

하지만 이대로 가면 정권교체도 이루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기대만 하기에는 건너뛴 과정들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이 바뀐 것인지 실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되고 공범자들과 함께 특검 수사를 받고 있으니 그 자체가 커다란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많은 풍경들은 박근혜 시대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박근혜의 충직한 대리자로서 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의 논란거리 정책들은 철회되지 않은 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TV를 켜면, 어떻게든 세상의 변화를 막으려는 편파방송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과연 촛불이 승리한 것이 맞기는 맞는 건가. 이런 물음을 떠올리는 사이, 새누리당에서 이탈했던 보수층이 개혁보수신당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반기문 전 총장과 손잡는다면 보수정치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6월 항쟁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반년 뒤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노태우 정부를 만들어주었던 악몽을 기억하기에 미완의 촛불혁명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야당들이 너무 넋을 놓고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가 없다. 국회에서 탄핵을 의결한 이후, 최순실 청문회를 제외하고는 야당들과 국회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촛불민심이 지금과 같은 개혁의 황금기를 마련해주었다면, 국회는 이 절호의 기회에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책무이다. 개헌과 결선투표제는 대선주자들의 이해관계 셈법이 달라 묶여 있다. 정치개혁, 검찰개혁, 방송개혁, 재벌개혁 등을 위한 노력은 지지부진하다. 부자 몸조심하듯이 지금 이대로 대선을 치르는 것만을 최상의 조건으로 여겨, 우리가 집권하고 나면 그때 할 것이라는 식으로 넘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했듯이 정의의 실현은 인간이 아닌 제도의 몫이다. 정의의 핵심은 얼마나 공정한 제도를 설립하여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가에 있지, 상황에 따른 인간 개개인의 도덕적 미덕의 함양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람이 문제였다며 제도개혁을 뒤로 미루고 훌륭한 지도자의 ‘선한 의지’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정치는 다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이제라도 야당들은 개혁과제들을 이루어내는 데 성심성의껏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촛불을 들었더니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뀜을 실감할 수 있어야, 그 촛불의 마음들이 꺼지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불안은, 야당세력에 의한 정권교체는 과연 세상을 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재로부터 기인한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해서 그 자체가 세상이 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권교체는 지난 정권들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그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노무현 정부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노무현 정부는 노풍(盧風)으로 표현된 국민적 기대 위에서 출범했지만 집권 1년도 되지 않아 민심이반을 낳아 조기 레임덕에 직면하고 말았다. 야당이 촛불민심의 수혜자가 되어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민심을 끌어안는 리더십과 능력을 보이지 못한다면 악순환은 반복되고 말 것이다. 특정 계파와 세력만의 정권이 아닌, 국민 전체의 정권으로 일체감을 심어줄 때만이 지속가능한 정권이 유지될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이 다시 독재와 왕정으로 돌아간 까닭

하지만 집권이 유력시된다는 야당세력과 후보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마음을 껴안을 수 있는 포용적이고 역동적인 리더십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 나의 세력이 국민 눈높이에서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 또한 많이 부족해 보인다. 자신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포용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정권’이 아니라 ‘그들만의 정권’이 되어버릴 위험은 상존한다. 이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지는 정권교체의 결과가 다시 실패로 귀결된다면, 이명박근혜 시대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역사에는 샴페인을 터트려도 좋을 때란 없다. 역사는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 앞으로 가는 듯했다가 다시 뒤로 후퇴하여 온갖 시련과 희생을 겪다가 다시 한 발 앞으로 가곤 하는 것이 인간들의 역사였다. 식민지 지배와 해방, 다시 전쟁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의 성취와 후퇴, 역사의 진보와 반동이 널뛰기하듯이 오갔던 우리 현대사가 이를 아프게 말해주고 있다.

신(神)이 아니면 손댈 수 없다고 믿은 왕의 목을 자르면서 새 세상을 열었던 프랑스 대혁명도 기요틴 위에서 그 엄청난 피를 뿌렸지만, 덧없이 독재와 왕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당통은 9월 학살을 주도하며 혁명을 지켰지만, 공포정치 앞에서 온건파가 되었다가 데물랭과 함께 기요틴에서 처형당한다.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에서는 ‘혁명의 도덕’을 말하는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에 좌절하여 ‘개인’을 말하는 당통이 대비된다. 기요틴으로 내몰리고 있던 당통의 말이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 피우는 거야.”

비상식의 사회

역사에 대한 당통의 회의(懷疑)가 우리 역사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빈다. 지금 우리는 앞에 놓인 자갈밭 길을 내다보면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것일까. 이 변화는 이번에는 지속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찰나처럼 지나가 버리는 새벽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유창선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