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28) 오늘 내사 마 다 들어줄꼬마!

“난 우리 애들과 지 에미에 대해, 또 우리가 예전에 아내와 함께 살았던 그때 얘기를 실컷 한 번만 해봤으면 좋겠는데, 애들은 내 맘을 몰라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일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 하는 이가 있다.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겁니다. 아무도 몰라요. 나도 이리 혼자 돼보니 절절한 거라. 자식들도 그 고통을 모릅니다.” 그의 눈가는 짧은 만남에도 벌써 촉촉하다. 울음 반 반가움 반으로 일주일치 얘기를 쏟아낸다.

“식사는 잘 챙겨 드셨나요?”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고통이지요.”

“많이 힘드셨나 봐요. 그래도 건강을 잘 챙기셔야죠.”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 오는 낙밖엔 없어요. 지방에 사는 큰딸이 매주 전화하지만 그것도 귀찮고 성가실 때가 많아요. 물론 날 생각해서 하지만 잔소리 듣기 싫습디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술 더 떠서 이것저것 간섭하니 어떤 땐 전화 받기도 싫어 피해요. 매주 여기 오는데, 거의 2시간 넘게 걸려 힘은 들지만 그래도 여기 오면 사람도 만나고 우선 내 얘길 할 수 있어 좋아요. 그런데 이것도 다 부질없는 짓처럼 생각될 땐 참 난감합디다.”

“자식들 관심도 때론 성가시고 괜시리 짜증나서 이곳에 오는데, 어떤 때는 이마저도 허무한 것 같아 견디기 정말 힘 드셨겠어요. 어떤 게 가장 힘드세요?”

배우자와 사별한 중년에게는 성장한 자식들에게조차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있는데도 자식들이 몰라주기 때문이다. 사별한 아내의 묘를 찾은 중년남성 이미지. / wikihow.com

자식들의 관심도 때론 성가시고 짜증나

“외로움이오. 외롭다는 건 말로 다 못해요. 아무 낙이 없어요. 좋은 걸 봐도 덤덤하고 맛있는 걸 먹으니 맛이 뭔지 모르겠고 모래알 같고…. 그런데 더 힘든 건 뭔 줄 아세요?”

“뭔가요?”

“자손들이 내가 적적해 한다고 자주 날 찾아와요. 고마운 일인데 아무 소용이 없어요. 걔들이 오고가고가 내게 아무 힘이 안 되는 겁니다. 얘들은 몰라요.”

그는 2년 전 부인과 사별했다. 세상에서 가장 원치 않은 일이 아내와 헤어지는 거였는데, 바로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모든 것이 적막이었고 시간이 멈춰버렸다. 계절이 바뀌어도 무덤덤하고 주위의 위로와 걱정도 한낱 소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멍한 상황에서도 지나간 세월에 대한 기억은 왜 그리도 또렷한지, 야속하단다.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게 아닙디다. 그런 날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지난 시절을 헤매고 다닙니다. 때론 이러면 안 된다고 수면제 반 알 먹고 잠을 청할까 생각하다가도 그냥 아내와 함께하고 싶어 무작정 날밤을 새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아내는 외모가 곱지도, 성격이 상냥하지도 않았단다. 그러나 그는 나이 들어 관절이 아픈 아내가 행여 넘어질세라 손을 꼭 붙잡아 주고 아내 가방을 어깨에 메며 살뜰히 챙겼다. 어디든 손 붙잡고 같이 다니는 부부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시샘 반 농담 반 놀리곤 했다.

“그 나이에 어디가 그리 좋다고 허구한 날 마누라 궁둥이 졸졸 따라다니는지.”

“남자 망신 다 시킨다. 마누라 가방은 왜 맨날 들고 다니노….”

한 무리의 영감들이 한마디씩 씰룩거릴 때마다 알 수 없는 곁눈질이 허연 웃음들과 함께 사방에 흩어졌을 것 같다. 반면 속 모르는 아파트 젊은 부인들은 그의 남편들을 볶았으리라. “당신도 늙어서 대접받으려면 103호 할아버지 좀 보고 배워!”

“일찍이 엄마를 잃고 형님과 형수님 밑에서 자란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린 나이에 형님들은 무서웠고 형수들은 어찌나 매몰차던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아무 데도 숨을 곳이 없었지요. 이렇게 서러울 때마다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치마폭에 꼭 싸안고 내 하소연을 들어줄 텐데…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어린 나이에 많이 외롭고 서러웠겠어요.”

“그럼요. 서럽다는 건 말로 다할 수 없었죠. 그러다 우리 집사람 만난 건 나한텐 하늘이 준 행운이었어요. 내가 부모 복은 없어도 아내 복은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좋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큰 기쁨을 준 아내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 그 사람 성깔 많았지요. 체구는 작아도 내게 하고 싶은 말 막 했어요. 그래도 주변에서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한테는 어미 싸움닭같이 굴었어요. 물론 내가 형님과 형수님한테 당하면 당차게 나서서 입바른 소릴 해서 형님 내외가 싫어했지요. 형님들한테 대들었는데, 난 싫지 않습디다. 우리 엄마 다음으로 내 편이 돼 준 건 그 사람 하나였어요.” 그의 눈빛엔 처음과 달리 웃음기가 돌았다.

“그때 정말 든든했겠어요.”

사별 후 가장 힘든 건 내 편이 없다는 것

“그럼요. 든든하다마다. 내가 사낸데, 난 우리 마누라가 참 의지됐어요. 그래서 내가 가진 건 많지 않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주고 싶었지요. 엄마한테 못해준 것까지 다 보태서…. 그런데 애들도 많고 사는 게 여의치 않다 보니 내 맘같지 않아 그 사람이 고생 많았지요. 없는 집 힘 없는 막내한테 시집왔으니 울타리도 못 돼주고 뭐 하나 변변하게 물려받은 것도 없었지요. 거기다 눈치 볼 손위 식구들은 많았고.”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늘 아내한테 미안했던 것 같아요. ‘내사 마 눈이 삐있지. 뭘 보고 왔는지 모른다카이.’ 경상도 사람인 집사람이 툭하면 내게 던진 말인데, 그래도 난 그 사람이 이쁩디다. 날 떠날 수도 있었는데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있어줘서. 그 사람이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이 따뜻한 사람이었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걸 압니다.” 눈물은 주름따라 얼굴을 타고 내린다. 어릴 적 뽀오얀 그리움이 이제는 허연 회한과 함께 뒤섞여 흐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그 당찬 아내를 놓지 못한 것 같다. 그 옛날 일찍 그의 곁을 떠난 엄마 손을 놓지 못했던 것처럼 놓을 수가 없나 보다.

“아내가 떠나고 나서 가장 힘든 게 어떤 거였어요?”

“내 편이 없다는 것! 지금은 내 곁에 아무도 없어요.”

“자녀들이 있지 않나요?”

“있죠. 셋이나 있죠. 그 애들도 다 결혼해 돌봐야 할 제 식구들이 있어요. 다 내 피붙이지만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내 아내가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줬던 것 같아요.”

“그럼 자녀들과는 어떻게 지내세요?”

“애들이 저한테 이런저런 신경을 많이 씁니다. 친목모임에서 해외여행 가라고 큰딸애가 돈도 부쳐 오고. 아들도 바람 쐬고 오면 기분 좋아진다고 꼭 다녀오라고 합디다. 그런데 그 애들은 제 맘을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허전한지… 내가 얼마나 막막한지… 하루아침에 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를 겁니다. 내 맘 헤아린답시고 지 에미 얘길 일절 안 하는 걸 보면 알지요. 손자들에게조차 할미 얘긴 금기 사항으로 입단속시킨 것 같아요. 손자가 학교에서 상 탔다는 둥, 사위가 회사에서 승진한 얘기, 나랑 가족이 함께 여행 간다며 9인승 차로 바꿨다고도 합디다. 물론 날 기쁘게 하려고 이런저런 신경 쓰는 것 알지요. 일전에 해외여행 가라고 준 돈도 그냥 갖고 있다 후에 도로 줬어요. 딸애가 도대체 왜 이러시냐며 울고 난립디다.”

“따님이 많이 속상했겠네요. 정말 가족에게 원하시는 게 뭐예요?”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난 우리 애들과 지 에미에 대해, 또 우리가 예전에 아내와 함께 살았던 그때 얘기를 실컷 한 번만 해봤으면 좋겠는데, 애들은 내 맘을 몰라요. 예전 결혼 초에 아내가 내게 ‘죽은 어매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당신 어매가 그리 그립노. 당신 얼굴에 써 있다 카이. 어디 한 번 하고 싶은 대로 실컷 말해봐라. 오늘 내사 마 다 들어줄꼬마!’ 그날 이후 난 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이쁘고 내 마음속의 엄마도 더는 울지 않았지요.”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나는 그의 아내가 오늘밤 그에게 말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내가 그리 그립노? 당신 얼굴에 다 써 있다 카이. 어디 내 얘기 실컷 해봐라. 오늘 내사 마 다 들어줄꼬마!”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suh06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