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를 시청할수록 마음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떠도는 소문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연말이 턱밑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캐롤이 적게 들리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든다. 겨울은 그 고요하고 깊은 찬 공기와 하얀 입김만으로도 신기하리만치 우리를 안심시킨다. 후회되는 일, 마무리 못한 일들도 금년 마지막 달력과 함께 조용히 잊혀질 것 같기 때문인가 보다.
“정신 나간 여자 아니에요? 청문회 보셨지요?” 상담이 시작되자마자 그녀가 분을 참지 못하고 쏟아놓는다. “도대체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들도 어쩜 하나같이…. 이런 원칙 없는 나라가 어딨어요? 2016년 이 시점에 내가 이 나라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창피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 보면 나라 안팎 어디를 봐도 희망이 안 보여요.” 떨리는 목소리지만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말은 어느 방향이랄 것 없이 사방으로 튀는 파편 같았다.
“참 기가 막혔겠어요.”
“그럼요. 제 주변 사람들 다 그래요. 사실 저희 집도 저보다는 저희 남편이나 우리 애가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 글쎄, ‘내가 왜?’ 하더라고요. 어처구니없어서. 그런데 오히려 제가 요즘 가슴도 자꾸 뛰고, 갑자기 땀도 나고, 길 가다 한 번씩 맥이 풀리고 그래서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 같아서 왔어요. 요새 주위를 보면 많이들 심리상담 비슷한 것 받더라고요. 일단 제가 좀 정신을 차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국민들의 시선이 온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쏠려 있다. 직장인, 가정주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이야기뿐이다. 차분하게 한 해를 되돌아볼 연말이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을 정도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년들이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2차 담화를 TV로 지켜보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지인의 소개로 왔다는 그녀는 여느 주부들처럼 취업을 앞둔 자녀와 퇴직을 앞둔 남편 사이에서 오랜 세월 상담사 또는 해결사 노릇에 지쳐 보였고, 무엇보다도 한창 벌어지는 정치이슈에 노여워하고 있었다.
“애 문제에 남편 퇴직에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이 하나도 손에 안 잡히는 거예요. 사면을 둘러봐도 온통 그 얘기뿐이고, 하다 못해 TV를 틀어도 어느 틈에 기가 막힌 얘기가 흘러나오니까 짜증이 막 치밀어 올라와요. 나라 전체가 이게 무슨 꼴이에요? 그러니까 생떼같은 우리 아이들이 힘을 못 받는 거잖아요. 가장들은 또 뭘 믿고 일을 하냐구요? 힘들게 일해 꼬박꼬박 세금 내봐야 알 수도 없는 놈들 주머니로 다 들어가는데!” 그녀의 마음은 가정을 뛰쳐나와 세상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라 전체가 이게 무슨 꼴이에요?
12월은 나에게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달이다. 늘 이맘때쯤이면 간간이 들리는 캐럴과 함께 조금은 들뜨면서도 차분한 시간을 가지려 애쓰곤 했다. 마침 하반기 일정을 끝내고 며칠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이 생겨서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미뤄뒀던 집안일도 하고 싶었고, 컴퓨터 정리도 하고 싶었다. 나중에 보려고 찜해 둔 영화들, 좋은 동영상들을 보는 것 또한 좋을 듯싶었다. 물론 바쁜 일정 때문에 못 만난 친구들 모임도 또한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데 국회 청문회 날이 잡혔단다. 난 망설이지 않고 계획을 싹 바꿨다. 그동안 토막정보로 갈증나 있던 내게 국회 청문회는 알 수 없는 우중충한 가운데 오히려 반가운 뉴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TV 앞에 앉아 말 그대로 온종일 카메라 앵글을 쫓아갔다. 나는 스스로 놀랐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 그런데 꼬박 이틀을 청문회 시청에 쏟고 나자, 이상하게 마음속이 참 복잡해졌다. 내가 지금껏 믿고 있었던 것은 도대체 뭐지? 한편으로는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떠도는 소문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혼자만의 의미 있는 계획으로 남겨두었던 연말이 지나가버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친구들끼리의 연말 모임에 나갔다. 얼마 전에 쌍꺼풀 수술을 한 친구가 꽤 늦게 나타났다. “미안해, 요 앞에서 차가 한참 밀렸어!” 군색한 변명을 하며 들어오는 친구 얼굴로 우리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세월을 이길 수 없다며 처진 눈꺼풀을 수술할 때만 하더라도 친구의 고운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속으로 안타까워했는데, 막상 붓기가 가라앉고 또렷해진 얼굴을 보자 조금 납득이 된다. 더군다나 터무니없는 지각을 애교 있게 눈웃음으로 마무리하니 꽁한 마음이 풀어졌고, 다른 친구들 역시 그녀에게 자연스럽고 예쁘다고 한마디씩 해주었다. 친구가 신이 났는지 “성형외과 최신 늬우-스”라며 너스레를 떤다. “얘들아, 이번에 병원에 갔을 때 보니까, 너무 웃긴 게 있더라. 너희 청와대 패키지라는 거 들어봤니?” 성형외과에서 중년여성 대상으로 청와대 패키지라니. 아무리 비즈니스라지만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순발력에 놀라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온다. 5명의 중년여성들은 웃을 수도, 울 수도, 그렇다고 마냥 욕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각자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를 때쯤 저쪽 옆 테이블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젊은 샐러리맨들이었다. 최신 뉴스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홀 안에 퍼진다.
지금 되돌아 보면 약 두 달간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훼손되어온 것 같다. 말과 마음이 서로 부딪치고 싸우다가 연합하면서 고단해진다. 가족들은 TV를 향해, 연인들은 모두 핸드폰 속 뉴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곱지 않은 말로 첫 입을 뗀다. 한 해를 마감하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일상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너희 청와대 패키지라는 거 들어봤니?”
성형외과 얘기를 들은 친구들의 대화도 여느 때와 달랐다. 청와대 이야기가 끝도 없이 꼬리를 문다. 각자 버전으로 내뱉는 무수한 말을 먹다보니 시장기도 잊은 듯 각자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실어나르기에 여념이 없다. 앞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도 잊은 지 오래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 친구가 탄성을 지른다. “얘들아, 이거 너무 맛있게 생겼다. 어서 먹어 봐. 마늘 플레이크를 뿌렸네.” 다른 친구가 맞장구를 치자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음식을 마주하며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맛있었다. 만난 적도 없는 청와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서로서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비로소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서로 상대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더 올려주고 나누는 사이 우리의 일상도 우리 곁에 잠깐 돌아왔다.
“마음이 많이 복잡하시겠어요. 아이 취업에, 남편분 퇴직에…. 게다가 이렇게 나라 안팎이 시끄러우니 더더욱 마음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내 이야기에 그녀는 긴 한숨을 쉰다.
“맞아요.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가서 마음이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는데, 정말 힘드네요. 뉴스도 뉴스지만 제 가정일도 지금 만만찮거든요.”
내가 말을 이었다. “하나라도 좀 가벼워지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러려면 마음의 정리정돈이 필요할 텐데, 어떠세요?” “글쎄요. 지금 제가 무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처음에 내뱉던 그 거침없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여행가방도 정리가 안 되면 더 무거운 것처럼, 우리 마음도 여러 일들이 뒤죽박죽되어 있으면 더 무겁게 느껴지며 헤어나오기 힘들지요.”
“…….” 그녀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청문회로 뒤범벅이 된 나의 12월도 점점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핸드폰과 TV를 끄고, 커피를 한 잔 타서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지금 이 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마음은 다시 며칠 전 음식점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샐러리맨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은 퇴근 후에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앞에 놓인 음식도 잊은 채 열띤 토론과 고단한 신세 한탄을 반복하는 그들 사이로 내 자식들도 보였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suh0623@naver.com>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