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22) 한식 뷔페서 손도 안 댄 솥밥이 아까워…

‘뭐 어때. 여기선 다 버릴 건데, 버리느니 차라리 얼른 잽싸게 싸서 유익하게 활용하면 되지. 더군다나 이건 손도 안 댄 깨끗한 밥이잖아. 이런 걸 그냥 버리면 죄받아.? 갑자기 명분이 분명하니 진지해지며 속에서부터 당당함이 올라온다.

집 앞에 새로 오픈한 뷔페 레스토랑을 가족끼리 갔다. 신문 간지에 끼어온 광고 문구며 실내장식을 보며 언제 한 번 가야지 벼르던 곳이다. 한식 위주로 흰 쌀밥은 물론 잡곡밥도 있고, 갖은 솥밥, 영양밥 등 밥 종류만도 무려 7가지다. 몇몇 밥은 즉석에서 주문하면 30분 후에 나온다길래 앉자마자 애들이 시켜놓는다. 밥이 대수냐 싶어서 나는 어떤 특별메뉴가 있는지 뷔페 홀을 둘러보았다. 현란하게 종류도 여러 가지로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차려졌다. 이곳저곳 살펴보니 어떤 메뉴는 딱 봐도 그냥 고추기름에 비벼놓고는 ‘사천식’ 이라고 이름 붙이고, 밍밍한 몇 가지 반찬들은 ‘재래방식’이란다.

한쪽에서는 비빔밥 재료들이 특별 섹션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이 돈 주고 들어와서 비빔밥 먹는 사람이 있나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이 나이되면 뭐니 뭐니 해도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담아 온다.

중년 여성에게 뷔페 식당은 낭비의 공간이다. 어차피 버릴 음식이니 비닐봉지만 있으면 먹지도 않은 음식을 담아올 텐데 하는 충동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말을 꺼내는 순간 가족 앞에서까지 무안 당하기 일쑤다. 한 호텔의 뷔페식당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특별한 것도 없는데 맛있다는 가족

애들은 이미 요것조것 한 접시씩 담아 와서 서로 뭐가 맛있는지 크로스 체크하며, 같은 가격에 다른 곳과 뭐가 다른지 분석 중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아까 그 ‘사천식’ 요리를 꽤 핫하게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혀서 한마디 했다.

“이거 진짜 별 거 아니야. 그냥 불고기 있지? 거기에 양배추랑 당근 썬 거 넣고 고추기름 훅 둘러서 볶으면 돼. 너네 이 비슷한 것 예전에 많이 먹었잖아.”

“엄마, 이거 해준 적 없거든?”

맛있는 것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가 훅 던진다. 뭐, 해준 적 없다고? 먹성 좋은 지가 젤 많이 먹어놓곤 이제 와서 웬 오리발? 슬그머니 괘씸한 생각이 든다.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손이 많이 가게 해줬거든. 몸에 안 좋은 고기비계도 일일이 손으로 가위로 바르고, 야채도 더 다양하게 넣고 볶았단다. 국산 참기름에 국산 깨까지 뿌리고…. 니들이 내 정성을 알기나 해?

이번엔 남편이 “얘들아, 이 닭튀김 맛있다. 먹어봐” 한다. 애들이 먹기 전에 내가 냉큼 한 조각 집어서 먹어본다. 그냥 닭튀김이다. 올리브 오일 맛도 없다.

“뭐 특별한 것도 없는데, 뭐가 맛있다는 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아니 이 겨자소스 쫌 찍어먹어 봐. 되게 맛있는데?” 하며 또 먹는다.

“닭고기랑 겨자랑 원래 잘 어울려. 왜, 늘 내가 했던 거 있잖아? 그것도 겨자소스야.”

“아, 그랬나?” 다들 뷔페에 오자 맛 벙어리가 되었나? 뭐가 그렇게 하나하나 새롭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 흔한 고구마 샐러드도 맛있단다. 집 베란다에서는 고구마가 박스째 말라가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것도 맛있겠네. 엄마 이거 시켜볼까?” 딸이 단품 요리들이 적힌 메뉴를 보여주며 묻는다. 근사해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따로 돈을 지불하고 추가로 시키는 메뉴다. “아니야, 뭘 새삼 시키니. 난 배불러.” 여기 먹을 게 천진데 따로 돈 들여서 무슨 음식을 또 시키나, 아까운 생각이 든다. 뷔페에 있는 게 맛이 없나? “너 먹고 싶으면 시켜. 나는 괜찮아.”

무식하고 매너 없는 할매가 되는 순간

드디어 처음에 주문했던 밥이 나왔다. 정성스럽게 갖다 주는 솥밥이 탐스럽고 먹음직스레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밥을 보고 있자 이제야 밖에 나온 보람이 조금 생긴다. 이렇게 막 지은 밥은 언제 봐도 정직하고 충직한 가신 같다. 이 집에서 밥이 젤 맛있어 보이는데 나는 정작 배가 많이 찼다. 밥을 먹을 것인지, 물을 부어놨다가 누룽지를 조금 먹을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애들은 밥 위에 올려져 있는 밤알만 달랑 집어먹더니 다시 뷔페 음식들을 담으러 나간다. 아들들은 바비큐를, 딸은 보쌈고기를, 남편은 닭튀김을 리필해서 들어온다. “따끈한 밥 좀 떠줄게. 그릇들 줘” 하자 다들 밥은 됐다며 손사래를 친다. 왠지 진짜가 팽당한 기분이 든다.

나는 아들이 마시고 있던 얼음 가득한 콜라를 한 입 들이켰다. 어? 콜라가 이렇게 쨍했나? 평소 불량하게 봤던 콜라가 아주 시원하고 입에 짝 붙는다. 내가 콜라를 맛있게 마시자 아들이 신나서 얼른 새로 한 잔을 떠다준다. 얼음이 카랑카랑한 큰 콜라 컵을 보자 순간적으로 다 마시지도 못할 텐데, 뭐 좋은 거라고 이렇게 많이 따라왔나 싶고, 잠시 전에 내 목을 축여주던 청량함보다는 역시 불량해 보이는 것은 또 웬 변덕인지….

잠시 후 딸이 카페에서 파는 것처럼 아이스크림 위에 뭘 잔뜩 뿌려 가지고 왔다. 진한 커피와 과일도 배달됐다. 정작 가져온 사람들은 한두 입만 먹고 입을 닫는다. 애들이 남긴 아이스크림을 녹기 전에 슬며시 남편 앞에 밀어놓는다.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괜시리 이것저것 한 입씩 또 먹어본다.

그런데 나는 아까부터 저 솥밥에 눈길이 자꾸만 간다. 아깝다. 누룽지를 위해 한 그릇 소담하게 퍼놓았지만 아무도 관심 없다. 다만 누룽지가 궁금해 한 번씩 뚜껑을 들춰 볼 뿐이다. 누룽지를 위해 멀쩡한 영양밥이 천대받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누가 지퍼락 하나만 주면 딱 좋겠는데…. 가볍게 나오느라 들고 온 손바닥만한 지갑을 야속하게 뒤적거린다. 있을 리 없건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연히 손놀림이 비밀스럽다. 또 있다손 치더라도 어쩌지? 순간, ‘뭐 어때. 여기선 다 버릴 건데, 버리느니 차라리 얼른 잽싸게 싸서 유익하게 활용하면 되지. 더군다나 이건 손도 안 댄 깨끗한 밥이잖아. 이런 걸 그냥 버리면 죄받아.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갑자기 명분이 분명하니 진지해지며 속에서부터 당당함이 올라온다.

호리호리하고 앳되게 생긴 남자종업원이 “빈 그릇 치워드리겠습니다” 한다.

“네, 고마워요.” 그 종업원의 재빠른 손놀림만큼이나 순식간에 테이블이 깨끗해졌다.

“손님, 이것도 치워드릴까요?” 돌솥과 옆에 퍼놓은 밥그릇을 보며 그가 상냥하게 묻는다. 묻는다기보다는 그의 손은 이미 솥을 치우려는 듯 솥을 거의 잡고 있다.

“아, 아니에요, 놔두세요.”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내 손으로 제어하며 슬쩍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저어 혹시 위생 팩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네?” 어리둥절하며 되묻는다.

“아니, 여기선 이 밥 다 버리죠?” “그럼요.” “그래서 말인데, 손도 안 댄 걸 버리면 아깝잖아요. 내가 싸가고 싶어서….”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총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난처해한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엄마 왜 그래?” 황급히 딸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막아선다.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남편과 아들도 이구동성으로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못 들은 걸로 하시고 싹 치워주세요.” “아이고, 이 사람이….” “엄마는… 참.”

“버려야지. 반출됐다 사고나면 어쩌려구. 안 되지.” 남편이 옆에서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졸지에 무식하고 매너 없는 할매가 되는 순간이었다. 종종 동창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통하는 일이 이 순간엔 아주 우스꽝스러워졌다. 우린 다 알고도 웃고 넘어가는데. 못내 아쉽다. 비닐봉지 하나만 있었다면….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suh06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