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21) 중년의 아버지들은 왜 소외되고 겉도나

예전의 남자 어른들은 가정에서 근엄하고 반듯한 자세로 생활하셨다. 당연히 어린 자녀와 친구와 같은 모습으로 정답게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게 자녀를 키우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인터넷에 실려 화제가 됐던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시다. 이 시가 알려지자 많은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필자는 부모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강의를 할 때 이 시를 읽어주고 아버지들에게 “아빠가 있으면 무엇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아버지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당혹해 한다. 그러다가 나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돈 벌어다 준다” 또는 “내가 있으니 네가 태어났다”는 등의 대답을 한다. 그러고는 본인들도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짓곤 한다.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나”

한 번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분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도 이 질문을 했다. 거의 대부분인 남성들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난감해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한 표정을 짓다가 역시 “돈 벌어다 준다”는 정답을 말했다.

그 자리에 마침 부장으로 승진한 여성 몇 분이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 분들 중 한 명에게 자녀가 “아빠는 집에 왜 있어?” 하고 물어보면 엄마의 입장에서 뭐라고 대답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성 부장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네 아빠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 그 대답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래서 필자가 또 물었다. “얼마나 자주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러자 이번에도 그 여성 부장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매일.” 이 거침없는 대답에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400여명의 남성들이 모두 웃었지만 그 뒤끝은 허망했다.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가족을 모두 캐나다로 보내고 홀로 남은 40대 ‘기러기 아빠’ 강인구(송강호 분)가 가족의 일상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영화 <우아한 세계> 캡처

40~50대의 중년남성 가장들은 매일 회사에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를 “가족을 위해서 고생을 참고 죽어라고 일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40대 중년남성의 사망률은 세계 1위이다. 2006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40~44세는 1000명 중 3.8명, 45~49세는 5.7명이 숨졌는데, 이는 선진국의 2배 이상이다. 사망률 성비(여자 사망자 100명에 대한 남자 사망률 비율)도 40~44세는 305.4, 45~49세는 301.8로, 일본(190)·미국(180)·영국(150)보다 1.5배 이상 높다. 즉 우리나라 중년남성들은 같은 나이 또래의 여성보다 3배나 더 많이 사망한다. 하지만 정작 자녀와 부인은 “집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발표한 ‘OECD 주요국 사회적 관계 수준’ 자료를 보면 더욱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사회적 관계’ 면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 “만약 당신이 곤경에 처해 도움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답한 한국인은 OECD 36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긍정적인 답변을 한 사람의 비율은 72.4%었다. 이 중 15~29세의 긍정적 답변율은 93.26%로 회원국 평균(93.16)보다 다소 높았지만, 50세 이상 답변율은 60.91%로 조사 대상국 평균(87.20%)보다 한참 낮았다. 나이가 들수록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 대해 느낌을 나누어야

어느 아버지가 부인과 자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중년들은 마음속으로는 절실히 바라지만 실제 행동으로는 가족과 따뜻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소외되고 겉도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따뜻한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별로 없다. 예전의 남자 어른들은 가정에서 근엄하고 반듯한 자세로 생활하셨다. 당연히 어린 자녀와 친구와 같은 모습으로 정답게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게 자녀를 키우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가 되었다고 자연스럽게 자녀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의 중년 아버지들은 베이비붐 세대이다. 이들은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가장의 역할은 직장에서 살아남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들에게는 가족과 정서적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와 같은 생활을 하는 마당에 어느 세월에 ‘속 편하게’ 가족과 정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정은 그야말로 ‘푹 쉬는’ 장소일 뿐이었다. 가족 간의 친밀한 정서적 관계를 담담하는 것은 부인의 몫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경제적인 면만 책임지면 가장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쫓기면서 앞만 보고 살아와서 어느덧 중년의 고개에 다다라 주위를 바라보니 세상이 그 사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가족의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 있고 어느덧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이제는 가족과 살갑게 정서적인 교류를 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생겼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다. 문득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사람은 ‘밥’만 먹고살 수는 없다. 사람은 따스한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정’을 먹고 사는 존재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제는 자녀와 부인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여자들이나 아이들만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무시했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느낌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따스한 인간관계는 ‘세계 평화’나 ‘국가경제’와 같은 큰 주제를 나눌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느꼈던 사소한 감정들을 나누면서 만들어진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10여년 전 군 간부들을 대상으로 ‘가족 간의 의사소통’에 관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강의 도중 휴식시간에 조용히 노크 소리가 나더니 한 분이 강사휴게실에 들어오셨다. “잠깐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하고 예의바르게 양해를 구한 그는 내 앞에 있는 의자에 않더니 최근에 있었던 가족 모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그는 현재 헌병 병과의 원사로 있는 분이었다. 그에게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대위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그 아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혹시 장교인 이 아들이 아버지가 원사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든 생각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조기 전역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몰론 가족에게는 나이가 들어 현역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를 댔다. 가만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던 아들이 조용히 말을 했다. “아버지가 조기 전역을 하시려는 이유가 혹시 저와 관련이 있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군인인 것이 존경스럽고 군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제일 멋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려고 사관학교를 갔고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기전역을 하실 때까지 계속 현역으로 근무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번 생각해보마”라고 대답을 하고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혼자 울었단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해주는 아들이 너무 고맙고 또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들이 대견스러워서…. 이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참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된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평소에도 격의 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찬사의 말을 해드렸다. 흐뭇한 미소를 띠며 휴게실을 나가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아버지의 전형을 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syhan@korea.ac.kr>